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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les Adventure Jun 29. 2021

미국이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자세

피해자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요즘 미국에서는 올림픽에 나갈 선수를 뽑느라 야단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육상 선수를 했었던 남편 덕에 나도 육상 올림픽 선발전을 꽤 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종목의 올림픽 선발전도 보게 됐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여자 체조였다. 도마, 마루 운동, 이단 평행봉 등을 보고 있었다. 시몬 바일즈 (Simone Biles)라는 미국 기계체조 선수가 있는데 되게 잘하는 선수라고 했다. 이미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땄다고 했다.


오른쪽이 시몬 바일즈 (Simone Biles)


자본주의의 나라답게 올림픽 선발전 중계 중간중간에 광고가 나온다. 육상 경기 중에는 육상 선수가 광고 모델로 나왔다. 그리고 체조 경기할 때는 체조 선수인 시몬 바일즈가 우버 잇츠 (우리나라로 따지면 배달의 민족 같은) 광고 모델로 나왔다. 게다가 경기 끝나고 시몬 바일즈 인터뷰가 나왔다.


인터뷰어: 왜 체조로 돌아오기로 했나요?

시몬 바일즈: 내가 여기 있음으로써 지난 일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I'm still here, so it's not going to disappear - we have power behind it)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거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토 나오는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 짧게 정리해 보겠다. 래리 나사르 (Larry Nassar)는 미국 체조연맹에서 여자 체조선수들의 물리치료 및 팀 닥터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그것도 약 30년간. 게다가 미시건 스테이트 대학교에서도 (Michigan State University), 한 고등학교에서도 운동선수들을 위한 팀 닥터로 일했다. 그 30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서, 올림픽을 대비해 훈련하는 동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동안, 수많은 여자 체조선수들이 성폭력을 당했다. 그중에는 아직 성인이 아닌 여자 아이들도 있었다. 성인이든 어린이든, 올림픽에 출전을 했든 못 했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인터뷰를 했든. 여자 체조 선수들은 그렇게 피해를 당했다.


그 30년 동안 래리 나사르는 아주아주 뻔뻔하게, 심지어 선수의 부모님이 코 앞에 있는데도, 물리치료의 명목으로 여자 선수들에게 성폭력을 가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실제로 일어났다. 선수들은 치료를 받으면서 이상함을 느꼈지만, 래리 나사르는 선수의 부모님들과 대화를 하면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했기에, 이게 정말 치료를 위해서 그런 건가 보다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혹시 이게 정말 성폭력이라면 이미 나사르는 잘렸겠지 하는 생각에, 이건 정말 치료를 위한 건가 보다 싶었다고. 치료를 위해서 필요한 거라고 팀 닥터가 말하고, 워낙 오랫동안 미국 체조 연맹에서 물리치료와 의사 역할을 했었고, 오랫동안 안 잘렸고, 체조 선수들에겐 너무나 당당하게 "내가 물리치료로는 최고고, 나한테 치료를 받아야 너가 부상을 안 당한다"는 식으로 성폭력범은 권위를 지켜왔다. 팀 닥터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너무나 뻔뻔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가해 왔다.


이 30년 동안 쌓여 온 폭력이 드디어 2016년에 인디애나폴리스 스타라는 미국의 지역 신문을 통해서 밝혀졌다. 그동안 래리 나사르에 의한 성폭력이 만연했고 피해자가 한 둘이 아니며, 심지어 그 사실을 체조연맹이 알고 있었지만 그걸 경찰이나 FBI에 신고하지 않았고, 연맹이 조직적으로 성폭력을 은폐했다. 그 만행이 궁금하거든 넷플릭스에 있는 다큐멘터리 Athlete A를 꼭 보길 바란다. 이 성폭력 사건이 터져 나온 지 4년 뒤인 2020년에 만들어진 다큐다. 다큐가 나오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피해자들이 500명 달한다. 미시건 스테이트 대학에서, 체조 연맹에서, 고등학교에서. 나사르가 있었던 모든 곳에서 피해자가 발생했다. 


보기 전 비닐봉지 필수. 왜냐면 토 나오기 때문에.



참고로 Athlete A는 신문 기사에서 흔히 보이는 "선수 A"라는 뜻이다.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이름 대신 A라고 칭하는 데, 넷플릭스 다큐가 나오기 한참 전에 이미 전국 신문 기사를 통해 피해자들 중 일부의 이름이 밝혀졌기 때문에 굳이 익명성을 보장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넷플릭스에서 굳이 제목을 선수 A라고 지은 이유가 뭘까?


내 생각엔 이미 목소리를 낸 500명의 피해자를 포함하여, 아직까지 차마 신고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어서 아직도 익명으로 남아있는 모든 피해자를 위함이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들은 2016년에 최초로 래리 나사르의 성폭력을 신고한 매기 니콜스 (Maggie Nichols)라는 선수를 일컫는다고 한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하다. 연맹에서 나름의 자체 조사라고 쓰고 은폐라 읽는다를 할 때 이 선수를 Athlete A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이 성폭력 피해자 중 계속 체조를 하는 선수는 시몬 바일스가 유일하다. 시몬 바일스가 그 트라우마 가득한 미국 체조 연맹으로 다시 돌아와, 올림픽 선발전에 나왔다. 그랬을 때 시몬 바일스를 미국에서는 어떻게 다룰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피해자의 정체성을 피해자로만 국한하지 않는다.


선발전에 나온 시몬 바일스를 평가할 때는, 정말 시몬 바일스의 체조 기술과 능력에 대해서만 평가한다. 이번 올림픽 선발전 중계 중, 시몬 바일스가 성폭력의 피해자였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시몬 바일스를 피해자로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선수로서 그 능력과 기술력을 묘사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게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터뷰를 할 때에도 언론은 선을 잘 지킨다. 체조를 1년 반 동안 쉬었는데 왜 다시 하기로 했냐는 질문 정도가 가장 깊은 질문이다.


그리고 시몬 바일스가 광고에 나온다. 이 광고가 주는 의미는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광고에 나온다" 보다 훨씬 크다. 이 광고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몬 바일스가 다시 체조를 하러 세상에 나왔을 때, 시몬 바일스의 정체성을 성폭력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고 체조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9갠가를 딴 대단한 선수인데 응당 티비에 나올 만 하지. 근데 이 응당한 게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광고주가 성폭력 피해자를 모델로 쓰는 걸 봤나? 오히려 가해자가 모델로 나오는 게 도리어 현실. 금메달을 몇 개를 따든, 성폭력 피해자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우리나라 광고주는 그 피해자를 모델로 쓰지 않을 거다. 왜냐면 시몬 바일스같은 사람을 운동선수로 보기 이전에 성폭력 피해자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성폭력 피해자라는 게 알려지는 순간, 주홍글씨가 박힌다. 거짓말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왜 그때 말 안 했냐고 질타당하고, 운동을 해도 운동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고 "그때 얘가 무슨 피해를 받았고 어쩌구 저쩌구" 등 피해사실로 평가당하고.



이런 의미에서 이번 올림픽 미국 여자 체조 선발전 중계는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 외에 미국에선

(1) 피해자 (victim)라는 말 외에 생존자 (survivor)라는 용어도 있다.

(2) 피해 사실에 대해 언론이 적어도 더 이상 자극적인 기사를 쓰지 않는다.

(3) 가해자의 서사를 언론이 써 주지 않는다. 가해자는 그냥 가해자일 뿐. 병신 먹이 금지가 아주 잘 지켜진다.


미국이라고 다 이런 건 물론 아니다. 병신은 어디나 있습니다. 다만 병신의 비율이 많고 적음의 차이. 처음 래리 나사르 사건이 터졌을 때 유튜브에서 댓글 보면 알게 될 거다. 거짓말이라고, 창녀라고, 돈 노리고 하는 거라고 2차 가해가 있었다. 이것도 넷플릭스 다큐에 나온다. 게다가 체조연맹은 30년 넘게 조직적으로 성폭력이 은폐됐다. 그 외에도 밝혀지지 않은 성폭력과 은폐는 수도 없이 많을 거다. 미국도 한참 멀었다.



참고로 래리 나사르는 아동 성착취물 소유로 60년 형을 이미 받았고, 팀 닥터로 본인의 권위를 이용해서 체조 선수들에게 성폭력을 가한 죄로 미시건의 한 카운티에서는 175년 형을, 다른 카운티에서는 125년 형을 받았다. 더 웃긴 건 이걸 항소를 했다. 자기에게 175년 형을 때린 판사가 편향 (bias)가 있으니 형을 다시 조절해달라고. 당연히 기각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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