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미국 살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elles Adventure Feb 14. 2021

사슴 유치원이 된 우리 집

사슴 가족이 산다.

작년 (2020) 여름, 저녁을 차리고 있는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뒤뜰에 사슴이 나타났다. 우리 집 뒤에는 작은 숲이 있어서 사슴들이 자주 오기에, 거의 매일 몇 번씩이나 사슴을 마주친다. 그래서 사슴이 나타난 것 자체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못 보던 사슴이 등장했다! 그것도 완전 완전 갓 태어난 애기.


갑자기 나타난 진짜 쪼매난 애기 사슴! 걷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다리가 휘청휘청했고 정말이지 오늘 태어난 사슴 같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사슴 두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가 누가 봐도 엄마처럼 보였다. 아주 애기가 딱 붙어 있으려고 했고, 엄마는 계속 애기 사슴을 핥아줬다.


이 날은 아쉽게도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세상에... 방금 출산을 한 엄마 사슴이 너무 안쓰러웠다. 차라리 뽀송뽀송한 날씨였다면 그래도 나았을 텐데. 출산도 힘든데, 새끼 낳자마자 비가 오다니. 아기 사슴도 고단해 보였다. 갓 태어났는데 비를 와장창 맞아야 하다니.


처음 조우한 날






그러고 한 1주일 정도는 이 사슴 모녀를 사실 새끼가 암컷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얘를 밤비라고 칭했기에 그냥 모녀라 하겠다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밖을 봤는데 세상에 아기 사슴이 엄마 젖을 먹고 있었다. 와 이런 광경 처음 봤다. 일단 새끼 사슴을 제대로 본 적도 없지만, 사슴이 풀을 안 먹고 젖을 먹는 건 더더욱 처음 봤다. 새끼는 쭈왑쭈왑 열심히 엄마 젖을 먹고, 엄마는 계속 아기를 핥아줬다. 크흡 울 엄마도 나를 키울 때 저랬겠지? 불과 1주일 만인데, 새끼는 이제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발육이 빠르구만.


새끼 사슴 밥 먹는 중




이때부터였을까. 이 모녀는 매일 우리 집에 들르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이 한 오후 4-5시쯤 되면 엄마가 새끼를 데리고 우리 집 뒤에 온다. 그러곤 큰 나무 뒤에 수풀이 좀 우거진 곳에 새끼들 데려다 놓는다. 한 30분 정도가 지나면 엄마는 자식을 두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1) 왼쪽 사진: 오후 4-5시쯤 엄마가 새끼를 데리고 옴

(2) 가운데 사진: 새끼를 우리 집 뒤에 둠. 보통은 저 큰 나무 뒤에 수풀에 두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찾아봐야만 보인다. 그러다 어느 날 새끼를 그냥 저렇게 큰 나무 옆에 두고 갔다.

(3) 오른쪽 사진: 새끼를 두고 엄마 사슴이 어디론가 떠나다가 노엘이와 눈 마주침.



그리고 해가 질 무렵, 거진 8시가 다 되면 엄마 사슴이 돌아온다. 엄마 사슴은 아기 사슴을 데리고 또 어디론가 떠난다. 그다음 날 오후 4-5시가 되면 또 둘이 같이 우리 집에 온다. 엄마 사슴은 새끼 사슴을 우리 집에 맡겨 놓고, 혼자 밥을 먹으러 가는 걸까? 자기도 뭘 먹어야 애기한테 젖을 주니까. 어디선가 풀을 뜯어먹고 오는 게 아닐까 추측했다. 


여름 내내 이 패턴이 반복됐다. 오후에 둘이 와서, 새끼를 우리 집 뒤에 떨궈 놓고 잘 숨겨 놓고,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3-4시간이 지나면 엄마가 새끼를 데리러 온다. 이걸 보더니 남편이 우리 집이 사슴의 보육원이 됐다고 했다. 듣고 보니 정말 비슷하다ㅋㅋ 일정 시간이 되면 엄마가 애기를 데리고 와서 어딘가에 맡겨 놓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엄마가 다시 와서 애기를 찾아간다. 와우 사슴 세계에서도 보육원이나 유치원이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게 우리 집이 될 줄은 더더욱 몰랐징.




여름이 새끼를 낳는 시기였는지, 동네 산책을 하다가 엄마 사슴과 아기 사슴 두 마리가 남의 집 뜰에 앉아 있는 걸 봤다. 이 아기 사슴 두 마리는 우리 집으로 오는 새끼 사슴에 비해서 조금 더 작았다. 우리가 추정하건대 아마 우리 집 주변에서 비슷한 시기에 새끼 총 세 마리가 태어난 듯하다. 딸 둘을 낳은 사슴네는 우리 집에는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고, 동네 산책을 할 때만 다른 집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딸 하나 가진 사슴 모녀네 전용 보육원인 듯하다.



부엌에 있으면 저렇게 창 밖으로 아기 사슴이 보인다. 이제 꽤 커서 막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깡총깡총 뛰는데, 자기가 뛰면서도 왜 뛰는지, 어떻게 뛰는지 잘 모르고 그냥 뛰는 것 같았다. 저때가 막 잔디 다시 살려보려고 노력하던 때였는데... 아기 사슴이 퐝퐝 뛰면서 여린 잔디를 다 뽑아 놓고 흐트러놔서 남편이 스트레스받았다. 저 쪼꼬만 애기를 쫓아낼 수도 없고. 그치만 안 그래도 여러 번 심었다가 겨우 자라는 잔디는 망가져가고ㅠㅠ


사진에선 잘 안 보이는데, 저때까지만 해도 아기 사슴은 얼룩이 있었다. 아기 사슴 밤비에 나오는 것처럼 흰 무늬가 있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저 무늬가 점점 없어진다! 와우 신기해. 그러다가 결국 엄마처럼 아예 무늬가 없어지는 듯하다.




급 가을이 왔다. 가을에도 여전히 모녀는 우리 집을 찾았다. 새끼가 많이 커서 이제 얼룩이 거진 다 사라졌다. 그래도 얼굴에서 애기 티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홍홍 귀여워라. 이 즈음에 노엘이가 이 새끼 사슴 구경하느라 창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원래도 창문 밖을 보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창문에 딱 붙어 있었던 적도 드물다. 계속 아기 사슴을 따라다녔다. 아기 사슴이 집 뒤에서 옆으로 이동하면, 노엘이도 옆으로 나 있는 창문으로 이동. 그러다 사슴이 집 앞으로 가면, 노엘이도 집 앞으로 나 있는 창문으로 이동. 놀고 싶었던 건지 해코지를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지만 노엘이가 발로 막 창문을 긁어대기도 했다.


금세 많이 컸죠?






급 늦가을이 왔다. 휴~ 낙엽 떨어진 거 보시죠. 저거 다 언제 치워... 오랜만에 아기 사슴과 엄마가 같이 있는 모습을 찍었다. 우와 몇 달 전만 해도 애기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고, 밤비 같은 얼룩무늬에, 엄마 젖을 먹었는데. 이제 어느덧 자라 체구가 사슴 청소년 정도는 된 것 같았다. 흑 괜히 감동적이었다. 왠지 내가 키운 기분...ㅋㅋㅋ


많이 자란 밤비





이제 밤비가 다 자랐는지, 다른 데로 간 건지, 겨울이 시작되자 이 모녀는 우리 집에 거의 안 왔다. 흑 평소에는 거의 매일매일 이 둘을 마주쳤는데, 막상 안 오니까 좀 서운하고 잘 지내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쩌면 저 수놈이 등장해서 영역을 뺏은 건가 싶기도 했다. 사진에 보이는 사슴은 뿔이 있는 수놈이다. 요렇게 생긴 수사슴 몇 마리가 우리 집 뒤에 자주 찾아왔다. 얘네들은 뿔도 진짜 크고 덩치고 크다. 이건 비디오로 찍은 게 있는데, 어느 날 밖에서 막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다보니, 엄청 큰 수사슴 두 마리가 서로에게 막 소리를 지르면서 뿔을 맞대고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롸? 왜 싸워... 그리고 싸움 구경을 하는 건지,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건지 또 다른 수사슴 한 마리는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엘이도 지켜본다.





안타깝게도 그 뒤로 우리는 이 모녀를 자주 보진 못했다. 아주 가끔 집에 들르긴 했는데, 예전처럼 루틴을 따르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다가 어제!!!! 문득 밖을 내다봤는데 우리 집에서 키운 그 새끼 사슴인 듯 보이는 사슴이 우리 집에 다시 와 있었다! 흑. 울 애긔 다 컸네. 사실 우리 집에 왔던 그 새끼 사슴인지, 다른 집에서 살던 새끼 두 마리 중 하나가 온 건지 알진 못한다. 그래도 체구나 저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 집에 왔었던 그 사슴 같았다. 엄마는 어디 갔는지 혼자 있더라. 내가 사진 찍으려고 하니까 금세 눈치채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안심해~ 너 유치원 원장님이라규!



사슴 모녀, 차에 치이지 말고 행복하기를. 



올해 (2021년)에도 어김없이 어미 사슴과 새끼 사슴이 우리 집을 찾았다. 자세한 건 여기.

https://brunch.co.kr/@ilovemypinktutu/104/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에서 집을 사면 안 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