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의 여름은 햇빛이 쨍하니 가득해서 등이 뜨겁다가도 바람이 불거나 그늘막에 들어서면 금세 시원해진다. 짐 가방을 든 손등 위로 스치는 바람, 콧잔등 밑으로 지나가는 바람 냄새조차도 좋은 날씨였다.
아직도 고스란히 떠오르는 헬싱키에서 보낸 첫날. 그날의 기분과 공기는 유독 선명하다.
항상 한 여름에 그것도 초 성수기에 여행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어딜 가든 날씨가 습하고 덥거나 우리가 있는 내내 비가 온 여행지도 많았다. 뜨겁고 습한 서울 날씨에 반해, 맑고 시원한 헬싱키 날씨라니. 이 도시를 택한 이유 중 하나로 꼽아도 충분했다. 추운 날이 익숙한 헬싱키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좋은 날씨와 햇빛이 더욱더 간절하다고 한다. 단 몇 개월뿐인 여름 햇빛을 즐기기 위해 다들 여름옷을 입기엔 좀 쌀쌀함에도 불구하고 민소매 차림이 많이 보인다. 햇빛이 잘 드는 벤치 혹은 잔디밭마다 여유롭게 앉아 햇빛 샤워. 이 곳 사람들이 여름을 보내는 방식이다. 도착한 날부터 시간이 멈춘 듯 여유롭게 전해지던 그날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헬싱키 중앙역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다 밖으로 나선 시간이 오후 4시.
역 앞에는 택시 혹은 트램을 타려는 여행객들의 줄이 늘어져있다. 서울에서는 아직인 선선한 바람이 코 끝으로 분다. 우선 디자인 디스트릭트에 있는 호스트 카를로스의 집으로 가야 했다. 유심칩을 꼽자마자 언제 도착하냐며 한가득 온 메시지를 읽으며 초초해졌지만, 중앙역에 도착하고선 결혼식에 늦어 열쇠는 매트 아래 두고 간다고, 시간 되면 저녁에 들르겠다며 다시 온 메시지로 가는 길이 느긋해진 순간이었다.
Kaffa Roastery - Pursimiehenkatu 29, 00150 Helsinki
숙소 근처로 가는 트램을 타니 중앙역 근처에 있는 대부분의 스팟들을 쭉 훑듯이 지나친다. 잠시 속소로 가는 길이 좀 아깝단 생각이 들었지만, 아침에 집을 나서며 방앗간 가듯 가고 싶은 Kaffa Roastery와 디자인 샵들이 가득한 디자인 디스트릭트를 오며 가며 눈에 담고 싶어 나름 고심한 결정을 위안으로 삼아 본다. 헬싱키 중심가는 워낙 작아서 웬만한 트램 코스는 한 번씩 다 타볼 수 있고 좀 먼 경로도 트램 하나로 이동이 가능하다. 시간적 여유만 더 있으면 울퉁불퉁한 블록과 시원한 바람을 맘껏 느끼며 이곳저곳 다 걸어 다니는 것도 좋겠다 싶다.
숙소가 가까워질수록 크고 작은 디자인 디스트릭트의 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망스럽게도 닫혀있거나 공사하거나.. 생각만큼 많지가 않았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스티커가 없으면 몰랐을 디자이너들의 개인 작업실들도 많고, 도착한 날이 주말인 데다가 헬싱키는 월요일까지 쉬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또 이유는 모르겠지만 며칠 동안 문을 열지 않는 샵들도 꽤 있었다. 이런 잠깐의 찜찜한 기분으로 헬싱키에 온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비슷한 건물들 틈으로 같은 장소를 한두 바퀴 돌고서야 주소에 맞는 건물을 찾았다. 입구가 으스스한 기운의 철문으로 되어있어서 또 한 번 찜찜한 기분으로 현관문을 조심히 열었다.
어두운 입구와는 반대로 조명 빛 같은 자연광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거실 창과 거실 한편에 사진보다 커 보이는 두 명이 쓰기엔 긴 원목 테이블. 그리고 침실에 놓인 제네바 스피커까지.. 카를로스의 센스 덕분에 모든 걱정이 안심으로 바뀌는 시간이었다. 숙소의 위치 따위 근처의 문 닫은 디자인샵들이 뭐 중요하냐며. 구석구석 눈과 마음에 담고는 며칠 동안 머물 이곳의 냉장고를 채워보기로 하고 장을 보러 나섰다. 다시 중심가로 걸어가 보며 구석구석 주변 구경을 해볼 겸 길을 외울 참이었다.
장 보는 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마켓을 생각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스토크만 백화점 지하 마켓에서 핀란드 맥주 Karhu(까르후)를 카트 한가득 담으며... 본격적으로 장을 보고 있었다. 물리도록 먹어야지 했던 연어는 비싸고, 의외로 과일들의 가격이 괜찮았다. 모양도 좋고, 종류도 많고. 서울에서 비싼 과일들 생각하며 신나게 납작 복숭아랑 패션프루츠를 한 봉지 담았는데 고작 한화로 만원이 채 안됐다.
빵 굽는 사치에를 생각하며 고민도 없이 담은 시나몬롤은 눈꽃 같은 슈가 아이싱이 뿌려진 모양만큼 맛있진 않았고, 쌀알이 들어있는 만두 같은 빵은 모양과는 다르게 식감이나 맛이나 괜찮았다. 나중에 우연히 티비에서 봤는데 헬싱키 사람들이 주식으로 많이 먹는 전통 쌀빵이었다. 이름은 Riisipiirakka. 리-시삐라까...?
내일 돌아다니며 먹을 초콜릿까지 챙겨 담고는 마트를 빠져나왔다. 곳곳에 눈에 익은 장소들이 많이 보였는데, 당장 보고 싶은 맘을 접고는 숙소로 가는 트램에 올랐다.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밤 9시가 다되어가는 시계를 보곤 저녁 식사가 너무 늦어졌다 생각하는 찰나. 건물 저편 너머로 아직 남아있는 하얀빛이 살짝 비추는 것을 보고서야 아, 백야 시즌이었지! 하고는 걸음걸이가 더 느긋해진다. 존박의 끝인사에 이어 한국에서 새벽 2시가 넘어야 하는 라디오의 시그널을 들으며 첫 끼로 먹을 음식들을 테이블에 늘어놨다.
서로 오느라 수고했다며 건배를 하고 목마름에 원샷을 했던 그 맥주 맛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씁쓸하고 진했던 까르후의 묵직함과 달큼했던 복숭아의 한입, 소소한 대화들 하나하나가 지금도 너무 선명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헬싱키의 첫날-밤이었다.
카를로스의 집 - Merimiehenkatu 31, Helsin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