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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이슈와 ODA 연계성

by 라이프파인

최근 캄보디아는 온라인 사기, 인신매매, 감금과 폭행이 일상화된 ‘범죄의 소굴’로 전락하며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수많은 한국인이 피해자로 희생되는 끔찍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제가 몸담은 국제개발 분야, 특히 대(對)캄보디아 한국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의 방향성에 대한 작은 의견을 내보고자 합니다.

캄보디아가 범죄의 온상이 된 것은 치안 악화의 차원을 넘어, 지울 수 없는 '과거' 역사의 상흔과 부패로 얼룩진 '현재'의 시스템이 맞물려 만들어낸 구조적인 재앙입니다.


문제의 뿌리: 킬링필드와 통제 불능의 국경

캄보디아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근간을 뒤흔든 비극적 역사를 되짚어봐야 합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이어진 크메르 루주 정권의 '킬링필드' 대학살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더불어, 국가를 운영할 법률, 행정, 교육 시스템과 인적 자원 전체를 완전히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에는 정의와 법질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오직 힘의 논리와 폭력만이 생존의 규칙이 되는 무법의 상태가 고착화되었습니다.

오랜 내전과 독재는 부패와 불법을 용인하는 사회적 가치를 만들었고, 상호 감시와 고발의 공포는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여 부패에 맞서 싸울 건강한 시민사회의 성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태국, 라오스, 베트남과 맞닿은 길고 허술한 국경은 초국가적 범죄 조직에게 최적의 활동 환경을 제공했으며, 이는 최근 중국계 범죄 조직이 대거 유입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위기의 현재: 독재, 부패, 그리고 '카지노 자본주의'의 결합

킬링필드의 폐허 위에서 훈센 총리의 38년 장기 집권과 그의 아들 훈 마넷에게 이어진 권력 세습은 부패를 국가 운영의 핵심 시스템으로 만들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소수 엘리트에게 국가의 이권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이 정권은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국제 범죄 조직과 결탁하여 그들의 활동을 비호하는 공생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2024년 기준 캄보디아의 부패인식지수가 180개국 중 158위로 최하위권에 머무는 현실은, 범죄를 단속해야 할 사법 시스템이 사실상 마비되었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정치적 부패는 기형적인 경제 구조와 맞물려 위기를 증폭시켰습니다. 특히 시아누크빌과 같은 지역에 무분별하게 유입된 중국의 막대한 '카지노 자본'은 온라인 도박과 자금 세탁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2019년 캄보디아 정부가 온라인 도박을 금지하자, 이 거대한 인프라와 인력은 곧바로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 등 더욱 악랄한 온라인 사기 범죄로 전환되었습니다.


ODA 논란과 대한민국의 딜레마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윤석열 정부 시기 결정되었던 대규모 캄보디아 ODA 사업은 심각한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2025년 ODA 지원 예산을 전년 대비 거의 두 배 가까이 증액하기로 한 결정은, 한국인 대상 범죄가 급증하는 상황과 맞물려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1987년 이후 사용된 적 없는 '민간협력 전대차관'이라는 불투명한 방식과,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는 특정 단체 관련 인사가 사업에 개입하려 했다는 의혹이 언론을 통해 제기되면서 ODA 사업의 순수성과 타당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현재, 이재명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해당 ODA 증액안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에 착수했으며, 신규 대규모 사업의 집행을 잠정 보류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ODA를 완전히 중단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캄보디아는 아세안의 핵심 회원국이자 중국의 영향력이 막강한 지정학적 요충지입니다. 만약 한국이 ODA를 전면 중단하고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면, 그 공백을 중국이 즉시 파고들어 동남아시아에서의 외교적 입지가 더욱 좁아질 수 있다는 현실적인 외교 안보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ODA 관련 개인적 소견: 전략적 패러다임의 전환

현재 밝혀진 것만 200명이 넘는 한국인이 캄보디아에서 납치, 감금된 것으로 추정되는 등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만약 미국 시민 한 명이 납치되었다면 국가는 어떻게든 그를 데려왔을 것”이라는 국민적 분노는, 정부가 자국민 보호를 위해 더욱 강력하고 직접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엄중한 현실은 향후 ODA 정책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합니다.

이제 원조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외교적 수단으로 재설계되어야 합니다. 도로와 교량을 건설하는 대규모 인프라 원조가 결과적으로 부패한 엘리트의 배만 불렸다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야 합니다.

'다 끊겠다'는 경고가 공허한 수사에 그치지 않도록, 범죄인 인도 조약의 실질적 이행이나 합동 수사 본부 설치와 같은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한 요구사항을 제시하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기존에 진행 중인 사업까지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실행 가능한 압박'을 가해야 합니다.

대(對)캄보디아 ODA는 양적 팽창의 시대를 끝내고, 국익과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략적 질적 전환'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묻지마 지원'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캄보디아의 변화를 이끌어낼 정교한 외교적 압박과, 우리 국민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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