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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준 Sep 14. 2017

#3 침상정리를 하다가

죽음은 드라마틱한 결과가 아니다.

#3 침상정리를 하다가



처음 호스피스 봉사라는 걸 듣게 될 때, 사람들은 꽤나 드라마틱한 요소를 상상하곤 한다. 그 이야길 들어보면 꽤나 그럴 듯하다. 대표적으로는 손을 잡고 아쉬움을 드러내는 환자의 모습이라던가, 삶을 정리하는 이의 쓸쓸한 모습, 아니면 가족과 눈물 어린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 등을 상상한다. 나 역시 그런 상상을 품고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했기에 어떻게 하면 환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최대한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지 궁리했다. 

하지만 실제로 저런 드라마틱한 요소를 접하기는 힘들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체로 환자는 봉사자에게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 이유야 차고 넘치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유로는 ‘관심가질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막말로 계속될 것만 같았던 내 삶에 어느 날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하지도 않는 끝이 다가와 무척 심란한 마당에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력이 될까?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니다. 오히려 ‘내 코가 석자’인 마당에 내 앞에서 관심을 끄려는 이들에게 고마움보단 화가 먼저 일어날 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신다. 마지막까지 이웃과 함께 하고자 하는 분들, 따뜻함을 전하고자 하는 분들도 존재한다. 다만 그 수가 소수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봉사자는 환자와 접점을 가지기 힘들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에서는 환자와 봉사자 사이에 적절한 거리감이 존재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나의 일상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반적인지라 무언가 화려하거나 감정이 과격하게 흔들리는 일은 전혀 없다. 일이 있다면 대체로 필요하지만 결코 눈에 띄지 않는 일이거나 환자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을 한다. 가령 환자가 머물고 간 자리를 깔끔하게 치우는, 그래서 다른 환자가 누울 수 있도록 하는, 침상정리 같은 일.      

           

그 날도 그랬다.     


“화준 학생, 꽉 잡고 당기세요.”

“어우, 알아서 척척 잘하네!”     


정말이지, 봉사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느꼈지만 가장 많이 익숙해진 건 ‘침상정리’가 아닐까 싶다. 훗날 부모님께서 ‘죽음’에 가까워질 때쯤 병원에 머물게 되실 텐데, 적어도 그때가 되면 부모님 침상을 능숙하게 정리 및 정돈하는 내 모습에 의사와 간호사, 다른 봉사자들은 놀라겠지.

침상정리는 ‘땀을 흘릴 정도로 근육을 격하게 사용하며 정리하는데 반해 눈에 띄는 건 무척 미미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애써 노력해 확인하지 않는 이상 침상정리에 대해 알아챌 일은 없다. 그저 ‘오, 깔끔하군!’ 이정도? 아마 효율과 효과를 중요시하고 눈에 띄는 걸 선호하는 현대사회관점에서 볼 때 침상정리는 꽤나 낮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속으로 이런저런 평가를 내리며 나의 노고를 스스로 다독이던 중 맞은편 복도에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임종하셨나봐.”

“네?”

“여러 사람이 복도에 나와 있고 몇 사람은 울고 있잖아. 대부분 저런 경우엔 임종하신거야.”     


내가 몸담고 있는 호스피스에서는 환자분들께서 임종하셨을 때 모든 봉사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긴다. 개인적 추측이지만, 어제 오늘을 알 수 없는 호스피스 특성상 언제 환자가 돌아가셔도 모르는 곳인지라 그러한 시스템이 자리 잡힌 거 같다. 어제까지 인사 나눈 환자가 오늘 임종하실 수도 있는 거니까. 봉사자를 배려해 보내는 메시지라고 여기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갓 신입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까지 환자분들의 임종을 메시지로만 확인했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도중 임종을 맞이한 환자가 생겼다는 점이다. 문자로 통보받았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을 거라 여겼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묘한 기분. 텍스트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그때 그 순간,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흘낏 쳐다보았다. 침상 정리를 위해 고무장갑을 끼고 한 손에는 젖은 수건을, 다른 한 손에는 칫솔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고무장갑과 젖은 수건, 칫솔 그리고 임종. 너무 간격이 큰 조합인지라 순간 이해를 못했다. 그건 마치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동시에 붙어있는 거랄까? 적어도 내가 침상정리를 하는 도중에 벌어지기엔 임종은, 사람의 죽음은 이토록 쉽사리 겪을 일이 아닌데.


선배 봉사자는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는 어투로 툭 말씀하신 뒤 다시 맡은 일에 집중했다. 괜히 나 혼자 무게를 잡는 거 같아 혼란스러운 머리를 잠시 구석에 박아놓고, 다시 침상정리를 이어갔다.                




시간이 흘러 신입과정이 끝나고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졌을 때쯤에야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때 겪은 기분은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왜 그럴까 싶어 고민해봤는데 아마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삶이란 거 참 대단하다 여겼는데, 별 거 없이도 사람은 죽는구나.”     


워낙 인생은 아름답고 가능성의 연속이라는 걸 들었기 때문일까? 죽음 역시 무언가 의미 있는, 드라마틱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죽음은 너무 일상적으로, 덤덤하게 일어났다. 죽음이 주는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라면 바로 그런 거가 아닐까? 우리는 드라마틱한 삶을 꿈꾸지만, 죽음은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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