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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다은 Aug 09. 2015

파리에서 만난 뒷모습들

헤밍웨이도 그랬대잖아


세느강 양 옆으로 고풍스러운 중세풍 건물들이 늘어서 있지만, 견문이 좁은 여행자의 눈에는 그저 오래된 서양의 건물로만 보일 뿐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대단한지 알아보기 어렵다. 서로 닮아 구별하기 어려운 중세풍 건물들과는 달리, 앞마당에 투명한 유리 피라미드가 놓여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한눈에도 아는 척 할 수 있으니 괜스레 더 반갑다.


반가움도 잠시, 입장권과 내부 지도를 손에 들자 마치 파리 지하철 노선도를 받아 든 것처럼 머리가 복잡해진다. 길 눈이 밝다고 자부했던 나지만 루브르 박물관 지도는 아무리 들여다 봐도 세 개의 건물 중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루브르에 전시된 시대별, 나라별 회화 작품과 조각 작품을 모두 감상하려면 한 작품당 1분씩 보더라도 일주일이 걸린다는 멘트로 오디오 가이드는 시작부터 겁을 준다. 역사에 길이 남은 대작들에 지긋한 눈길을 주기에 루브르 박물관은 너무도 광활했고, 이 모든 것을 찬찬히 감상하기에 나의 체력과 지력은 보잘 것 없었다.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파리의 미술관에서 한나절 시간을 보낼 때면 책에서만 보던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그런데 그 감격스러운 그림들보다도 내 시선을 오래 끈 풍경은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스케치북을 펼치고 그림을 모사하는 무명 예술가의 뒷모습이었다. 


살면서 마주했던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헤밍웨이 조차도 "A blank sheet of paper(빈 종이 한 장)"라고 대답했다. 빈 종이를 앞에 둔 막막함과 두려움은 거장이든 초보자이든 마찬가지이며, 작가든 화가든 음악가든 예외가 없을 것이다.


루브르에서 만난 서툴거나 능숙한 움직임으로 각자의 빈 종이를 묵묵히 채워가는 뒷모습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몇 백 년의 세월을 거쳐 역사의 심판을 이겨낸 작품을 앞에 두고 초라한 자신의 그림을 마주하는 용기가 왠지 근사했다.





맑고 쾌청한 파리의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느껴지는 날이었다. 이런 풍경 앞에서 화가라면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고 시인이라면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 분명한 그런 날. 아니나 다를까, 예술가의 다리 위에서 늙고 초췌한 화가 할아버지의 캔버스 위에는 아름다운 파리가 번져가고 있다. 미술관에서도 다리 위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파리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그림을 그리고 연주를 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보면서, 자기만족이 아닌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던 나를 돌아본다. 누군가 알아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의 묵묵함과 당당함이 부러웠고, 그렇지 못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파리에서라면 미술관에서든 길 위에서든 무명 예술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유산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미래의 유산이 될지도 모를 현재의 예술가들을 만나는 것은 멋진 일이니까.




막막함과 두려움에 긴 하루를 보냈을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헤밍웨이도 그랬대잖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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