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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써머 Jul 24. 2020

토익을 준비하다

서른셋 토린이가 되었습니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이었을 때,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겠다고 결심했었다. 어떻게 시작한 영어인데, 워홀 한 번 다녀오고 끝낼 수는 없지. 게다가 취업할 때, 회사까지 그만두고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는데 이력서에 영어 점수 하나 없으면 면접관은 묻지 않을까? “호주에서 뭐 했어요?” (물론 제대로 된 면접 한 번 본 적 없는 나의 빈곤한 상상일 뿐이지만.)


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영어 시험을 ‘토익’으로 정하고 한 달 반이 지났다. 사실 처음 토익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영포자였던 나도 영어에 재미를 붙였으니까. 겨우 생활영어만 근근이 했을 뿐이었지만 괜한 근자감이 든 나는 서른셋에 생에 첫 토익을 준비했다. 


인터넷을 통해 토익이라는 시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책을 구입하고 인터넷 강의도 결제했다. 의지력이 약한 나이기에 학원을 등록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과 주머니 사정, 나와 평생 상관이 없을 줄 알았던 바이러스 사정들까지 고려해야 해서 독학을 택했다. 원하는 점수를 얻기 전까지는 본격적인 구직 활동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점수가 필요하긴 했지만 나는 정말 영어를 잘하고 싶었기에 편법이나 술수 없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법이나 술수, 토익에 이런 게 있을 줄 알았다) 빈출 단어들을 암기하고 중요한 예문들도 같이 외우고, 길고 복잡한 문장의 구조를 해체해 정리하고, 각 품사의 쓰임을 구분했다. 특히 준동사의 용법을 이해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추상적인 뜻이 많은 토익 단어들은 외워도 외워도 헷갈렸다. indicate, instruct, qualify 같은 단어들은 구분하는 게 헷갈릴 정도로 비슷하게 느껴졌다. 뜻도 많고 품사도 다양해서 문맥에 따라 해석도 쓰임도 차이가 있었다. 동사가 어떤 전치사와 만나는지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했고, 명사 목적보어를 취하는 동사와 형용사 목적보어를 취하는 동사 들은 몇 개 안 되는 것 같은데도 희한하게 안 외워졌다. 그렇게 암기와 독해에만 매달리다 보니 ‘듣기’ 공부는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토익 공부만 하는 것 같은데도 번번이 그날의 목표를 채우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내 모든 시간을 오롯이 공부에만 집중한 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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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려니 책상은 왜 이리 더럽고 눈에 보이는 집안일들은 어찌나 많은지. 책상이며 책장이며 집안 정리까지 끝내고 의자에 앉으면 몇 문제 못 넘기고 끔벅끔벅 눈이 감겼다. 또 하필 그맘때 우리 집 강아지는 중병이 두 개나 도져 나는 지하철을 타고 전국의 용하다는 동물병원들을 돌았고, 틈틈이 부모님 가게 일도 도와드려야 했다. 


아니, 사실 이것들은 모두 핑계다.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에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여유를 부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익 시험을 코앞에 두고도 나는 외우고 까먹은 단어를 다시 외우고 있는 것이었다. 



핑계거리를 안 만들려고 자주 찾는 스터디카페




토익이라는 놈, 결코 만만치 않았다.


대학 시절 나를 제외한 친구들은 토익 공부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대학 졸업이든 취업이든 각자의 목적을 위해 강남으로 종로로 학원을 다니는 와중에도 나는 무슨 사명감처럼 꿋꿋이 토익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물론 그때는 동기부여도 못 느껴서 그랬지만, 사실 나는 토익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실력보다는 스킬이 우선되는 시험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였을까. ‘죽어라 점수를 땄더니 직장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선배들의 허세 섞인 푸념을 믿었던 탓일까. 나는 치러본 적도 없는 시험을 깎아내렸고, 그것은 토익을 준비하는 친구들에 대한 시선으로도 이어졌음을 고백한다. 목적의식 없이 떠밀리듯 보는 시험 따위는 보지 않겠다고, 나는 신념을 지킨다는 어떤 고고한 감정에까지 사로잡혀 마치 ‘토익을 보지 않는 삶’이 소신 있는 삶인 양 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참으로 자만했고, 오만했다. 이제와 보면 그 또한 허세였다. 내공은 없으면서 나를 특별하게 보이고자 했던 만용이었다.


이제와 늦깎이 ‘토린이’가 되고 보니 한때 열심히 공부해서 기본기를 쌓았던 친구들이, 하다못해 토익 경험이라도 있어서 출제 유형이라도 알았던 그들이 슬몃 현명해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뚜렷한 목적이 없던 당시에 시험을 보지 않은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선택이 다른 일에 대한 동기부여를 불러올 때가 많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토익을 공부하면 할수록, 이것은 결코 스킬 겨루기가 아니라 특정된 주제 내에서 답을 찾아 영어 실력을 분별하는 장치라는 걸 깨닫는다. 나의 실력이 참으로 형편없다는 것도. 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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