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예민하게 고민해 봐

<올바른 고기> 22장.

by 돈태

대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수영은 더 기다리지 않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대표실 안쪽으로 짧게 가라앉았다.


복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누군가 웃으며 통화하는 목소리, 탕비실에서 컵 부딪히는 소리. 방금까지 대표실 안에서 오간 말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상적인 소음이었다.


수영은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질문은 던졌지만,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 몰랐다. 같은 구호를 외치고 같은 집회에 나갔지만, 바꾸고 있던 것은 세상의 구조가 아니라 서로의 진영 배치였는지도. 이기고 졌다는 말은 반복됐지만,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점점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수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쪽으로 들어서자 여러 모니터 화면에 같은 이미지가 떠 있었다. 일주일의 전환, 한 끼부터 바꿔봅시다. 참여 인증 화면, 해시태그 게시물, 늘어나는 조회 수. 누군가는 댓글 반응을 읽으며 웃었고, 누군가는 기사 링크를 단체 대화방에 옮기고 있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성공에 가까워 보였다.


수영은 그 풍경을 잠깐 바라보다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잘되고 있다는 표정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자리 앞에 선 수영은 노트북 화면을 켰다. 열려 있던 사직서 파일이 그대로 떴다. 수영은 팀원들과 함께 있는 단체카톡방을 열었다.


"그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변변치 못한 팀장과 같이 일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저는 오늘부로 퇴사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의미 없는 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모습으로 다시 볼 날을 기대해 봅니다."


수영은 전송버튼을 누리지 않고 노트북을 닫았다.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사무실 안을 한번 둘러봤다. 태민의 자리는 아직 비워있었다. 그는 조용히 짐을 정리했다. 최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오지 않게. 그리고 조용히 사무실을 나왔다. 조금 전 태민과 함께 있던 카페로 향했다. 태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영은 카페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켰다. 아직 보내지 않은 단체카톡방의 메시지가 그대로 적혀있었다. 수영은 메시지를 지우고 짧은 문장을 적은 후 전송버튼을 눌렀다.


"제가 부족해 퇴사합니다. 고마웠습니다."


메시지가 전송되자 단체카톡방 메시지 옆의 숫자가 빠르게 줄었다. 그 시각, 태민은 사무실 건물 자동문 앞에 막 들어서고 있었다. 휴대폰 진동을 확인한 그는 걸음을 잠시 멈췄다. 수영의 이름 옆에 있는 간략한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태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곧 휴대폰 화면을 끄고 다시 걸었다. 사무실 안쪽에서는 이미 작은 소란이 번지고 있었다.


"뭐야, 진짜 나간다고?"

"갑자기 왜? 대표님은 아세요?"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낮은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겹쳤다. 누군가는 단체방을 다시 확인했고, 누군가는 수영의 자리를 힐끗 쳐다봤다. 평소보다 말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태민은 자기 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음은 조금 전보다 더 차분했다. 몇 시간 먼저 들었던 말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에서야 조금 전 카페에서 수영이 지었던 표정과 했던 말들을 이해할 것 같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니가 예민한 거 맞아. 그런데 더 예민하게 고민해 봐.'


다시 떠오른 문장은 여전히 불편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냉소적인 듯하면서도 진정성이 느껴졌고, 감정적으로 설득당하고 싶은 말이었다.


며칠 동안 태민은 별다른 표정 없이 출근하고 퇴근했다. 수영이 없는 사무실은 일상이 반복되며 수영을 지워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수영의 자리는 다른 사람들의 서류와 박스로 채워져 있었다. 태민도 마찬가지였다. 영상 수정 요청이 오면 수정했고, 카드뉴스 썸네일을 만들었고, 올라온 댓글을 정리해 전달했다. 윤리적 조리법 캠페인은 한동안 숫자가 좋았고, 참여 인증 게시물은 늘어나는 속도가 줄었다. 어색했던 수영의 빈자리가 자연스러워진 만큼 태민의 머릿속을 맴돌던 수영의 말들도 흐릿해져 갔다.


대선은 이변이 없었다. 여론조사 1위를 달리던 제1야당의 진보성향 후보가 결국 당선됐다. 이제 다른 세상이 올거거라고, 단체도 달라질 거라고 기대 섞인 말들이 사무실에서 잔잔히 돌았다. 대표와 전략기획팀장이 동행하는 외부 일정이 눈에 띄게 많아진 점 역시 이런 사무실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고, 대표가 인수위원회 동물복지분과 자문위원으로 위촉될 것이란 전망들도 오갔다. 태민은 그런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사무실에 있을 때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이 늘어나던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그는 SNS에 뜬 광고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에코젠 푸드 신제품 출시 배너였다. 윤리적 한 끼를 더 쉽게. 익숙한 문장이었다. 아직 수영이 사무실에 있을 때, 캠페인 회의 자료에서 본 표현과 거의 비슷했다. 태민은 광고를 넘기려다 손을 멈췄다. 며칠 전 단체 계정에서 본 문장도 비슷했다. 누가 누구의 말을 가져다 쓴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태민이 소속된 콘텐츠 메시짐팀이 전략기획팀과 합쳐진 날, 수영의 자리는 새로운 팀원의 자리가 됐다. 태민도 신설도 전략기획본부 소속이 됐고, 전략기획팀장은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대표는 내부 공지로 시너지 효과를 강조했고, 대통령 취임 30일이라는 타이틀을 단 기사들이 온라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소속은 바뀌었지만 자리는 그대로였던 태민은 핸드폰으로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윤리적 조리법'이 제목에 들어간 기사를 클릭했다. 여당이 된 진보성향 정당에서 대선 기간 공약으로 제시했던 정책들 가운데 '국민 통합' 차원에서 재검토가 필요한 법안들을 추리고 있고, 그 안에 윤리적 조리법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었다. 태민은 윤리적 조리법을 검색해 기사 몇 개를 더 읽었다. 윤리적 조리법은 몇 달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었다. 야당이 된 보수성향 정당의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법사위에서 윤리적 조리법의 통과는 불확실해 보였다. 여당 지도부 내에서도 윤리적 조리법 처리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추정 기사가 눈에 띄었다. 익명의 당 고위관계자 말을 빌린 기사는 법안의 우선순위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고, 현 상황에서는 경기 회복을 위한 재정 확대를 뒷받침할 법안 처리가 시급한 상황이라는데 여당 지도부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태민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저녁 시간 때인 만큼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열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과 밀키트, 배달앱 할인으로 주문해 남은 음식이 한 칸씩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비건 식품이었다. 그는 무엇을 먹을지 한참 서 있다가, 문득 수영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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