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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태 Nov 18. 2024

누가 루틴을 만드나, 였다

자본주의 즐기기/ 저항

"이 책이 부디 우리가 '거대한 타율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소박한 자율의 삶'을 추구하는 작은 자각과 실천에 도움이 되기를 빈다." <소박한 자율의 사상사, 이반일리치 中>


휴직하기 전. 평일 기상 시간은 새벽 5시다. 일어나서 씻고, 공복에 커피를 마시며 잠을 억지로 깬다. 옷 입고 집을 나서면 5시 35분 정도다. 5시 45분쯤 도착하는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면 '공장'에 도착한다. 직업 특수성 때문에 출근길에 계속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한다. 네이버 신문보기에서 당일 조간에 실린 주요 기사는 다 훑는다고 보면 된다.   

공장에 도착하면 아침 보고를 정리한다. 늦어도 7시 10분까지는 카톡 단톡방에 올려야 한다. 아침 보고를 끝내면 숨 돌릴 틈이 생긴다. 기상 후 첫 여유다. 30분 정도는 된다. 이미 카페인에 의존을 한 터라 더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만 할 뿐 습관적으로 두 번째 커피를 마시며 뇌를 다시 한번 각성시킨다. 하루 중 뇌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성화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빠르면 8시 전, 늦으면 8시 30분 정도에 아침 보고 피드백이 온다. 피드백을 받으면 즉시 그놈의 시간이 온다. 마감이다. 이 때는 그 어떤 사적인 일도 짜증의 대상이 될 뿐이다. 마감을 하고 나면 한숨 돌린 후 다음 날 마감할 아이템을 찾아다닌다. 다음날 아침 보고의 가안인 오후 보고를 마치면 자유롭게 퇴근이다. 퇴근이지만 가안을 가다듬고 보충하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 대부분이다. 


매일 정해져 있는 공장의 루틴은 장악력이 막강하다. 루틴 사이사이의 시간대도 자율적인 의지는 반영되기 어렵다. 다음 루틴을 고려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시간을 쓴다. 밥을 먹는 장소와 시간대는 물론이고 건강을 생각해 끼어넣는 운동 역시 다음 루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정해진 경계선 안에서 아등바등하며 사적인 시간을 보내놓고 여유를 즐겼다고 정신승리하는 꼴이다. 

몸이 어디가 고장 난 것만이 직업병이 아니다. 몸에 밴 공장 루틴에 사적 영역마저 지배된 일상 역시 직업병이다. 휴일에도 시간에 대한 강박을 받는다. 외식을 하거나 여행을 갈 때도 다음 일정을 고려해서 최적의 동선을 짜면서 효율성을 따지는 습관이 생겼다. 온전히 지금을 즐기지 못한다.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을 어디서 먹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퇴사 결심을 하고 휴직을 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루틴을 만들지 말자'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을 나오면서 마음 가는 데로 향했다. 그냥 걷거나 사우나를 가거나 운동을 했다. 점심때가 되면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고 생각나는 식당으로 길을 잡았다. 점심을 해결하면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가고 싶은 카페를 떠올렸다. 글이 잘 써질 거 같은 카페, 책 읽기 편한 카페, 멍 때리고 풍경을 바라보기 좋은 카페 등 그때그때 끌리는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지금 위치에서의 동선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많으니. 

이런 일상이 며칠 이어지다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다음 목적지를 결정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거 같았다. 집을 나와 어디로 갈지 고민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어디를 가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다 보니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낸 날도 생겼다. 스스로 '결정 장애'인가 의심까지 했다. 

두통도 생겼다. 루틴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매일 하고자 했던 일은 있다. 글쓰기와 책읽기다. 루틴을 만들지 않고 그때그때 마음 가는 데로 생활을 하다 보니 다음 일정을 결정하지 못하고 길에서 서성이는 순간이 늘어났다. 그렇게 머리가 지끈거리는 날이 이어졌다. 


루틴을 만들겠다는 다짐에 손발이 묶여버린 꼴이었다. 하루 일상의 뼈대인 글쓰기와 책읽기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운동을 할지 말지 등을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니 글쓰기와 책읽기에 들일 품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집중력도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최근 하루 중에 고정된 몇 가지 루틴을 정했다. 요일별로 운동 시간대와 방식(현재는 걷기 또는 사우나), 글쓰기와 책읽기 시간대 및 장소 정도다. 요일별 루틴은 계속 수정 중이다. 기존 루틴을 소화하면서 요일을 바꾸거나 시간대를 바꾸고 있다. 겪어보고 루틴의 장단점을 파악하며 조정하고 있는 셈이다. 루틴이 생기니 사이사이 시간대에 소화할 일정을 결정하는데 고민이 덜하다. 루틴 사이의 일정에 효율성을 따질 경우도 있고 비효율적이지만 마음 가는 데로 발길을 잡을 때도 있다. 

다음 루틴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은 하지만 꼭 지키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다는 마음가짐이다. 루틴을 지키지 않은 다음 날은 오히려 루틴 일정에 집중력이 생기는 경험을 했다. 죄책감 때문인지 책임감인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의 소리대로 쉼표를 찍으니 다시 능률이 오른다는 기분일까. 그리고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앞으로 또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드는 생각은 루틴을 안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만든 루틴이냐가 관건인 거 같다. 온전히 내 의지와 판단으로 루틴을 바꿀수 있다는 것도 보통 재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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