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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Jun 28. 2021

나의 이름은 '불안'입니다

내 곁을 맴도는, 혹은 나를 삼킨 이름, 불안


배낭여행 중 만난 여자 여행자들에겐, 공포의 여행이 하나 더 있더라고요. 숙소 주인이 밤늦게 문을 두드린다거나, 남자들이 길을 막고 희롱을 한다거나요. 시리아에서 만난 캐나다 여자 두 명은 울면서 짐을 싸더라고요. 여행이고 나발이고, 무서워서 더는 못 있겠다면서요. 그러니 여자 여행자들은 작은 소음에도, 겁이 덜컥 날 수밖에요. 잠재적 성폭력에 늘 시달려야 해요. 남자로 태어난 덕에, 그런 불안감은 없어요. 여자였다면 그렇게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밤을 홀로 휘젓고 다닐 수 있었을까요?


누구나 쫓기는 삶이지 않을까 싶어요. 꿈속의 저는 늘 쫓겨요. 입영 통지서가 날아오거나, 시험을 보는데 아는 답이 하나도 없거나 하는 꿈들 많이들 꾸지 않나요? 여전히 그런 꿈을 꾼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워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요? 이젠 홀가분하게 살아도 되는 나이 아닌가요? 중고등학교 때는 성적이 가장 큰 고민이었죠. 시험 당일에 밥이 넘어가는 사람이 이해가 가질 않았어요. 시험이  인생의 전부였죠. 시험이 끝나도 불안은 계속돼요. 답을 밀려 쓴 건 아닐까? 내가 정답을 썼다고 확신할 수 있나? 조작된 기억은 아닐까? 걱정을 사서 하는 게 저의 취미였어요. 실기 시험도 참 지긋지긋했어요. 노래를 하고, 리코더를 불어요. 평소 실력은 어디로 가고, 염소 우는 소리가 나요. 떨리는 소리가 진정이 돼야 말이죠. 체력장 때 오래 달리기를 하는데, 선두랑 반 바퀴 이상 차이가 나더라고요. 성적에 들어가니까 완주는 해야겠는데, 죽을 것만 같아요. 어찌어찌 꼴찌로 완주를 해요.


-한 바퀴 더


1등이 완주를 하고 숨을 헐떡거리니까, 저 역시 완주했다고 생각했죠. 이놈이 저를 한 바퀴 이상 추월했더라고요. 그때 그 마지막 바퀴는, 삶의 모든 의지를 분쇄기로 갈아버린, 잔혹극 한 바퀴였어요. 죽음의 세상이 이보다 더 고통스러울까? 의문이 들만큼 괴로운 한 바퀴였죠. 평생 시험 속에 살다 죽는 걸까? 고통의 뫼비우스 띠에 갇힌 햄스터 같은 삶인 건가? 감옥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저주했어요.


어릴 때는 형이나, 동네 깡패 형들의 손찌검이 무서웠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시험이 무서웠고, 성인이 됐더니 군대가 괴롭히더군요. 휴가 복귀할 때, 그 처참한 심정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모를 거예요. 복귀하면 얼마나 또 나를 갈굴까요? 한밤의 집합, 무지막지하게 다리를 찢어대는 태권도, 삽으로 가슴팍을 내려찍는 구타가 기다리고 있어요. 정문 초소에서 너무 겁이 나고, 막막해서 발길을 돌려요. 부대 앞 구멍가게에서 컵라면을 마지막으로 먹어요. 배도 안 고프지만, 먹어요.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고 싶어서요. 사형수의 마지막은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은 컵라면 한 끼였죠. 평생 탈영병으로 살 수는 없으니 라면 한 그릇 얌전히 비우고 부대로 복귀해요. 자유가 말살된 세상을, 내 발로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모를 거예요.


나이를 먹으니 병에 대한 공포가 기다리더군요.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닌데도, 주변에 암으로 죽은 사람, 항암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랜덤으로 오는 병이니, 대비를 한다고 대비가 되나요? 유튜브에 보면 건강 검진 꾸준히 받았던 암환자들이 수두룩해요. 조기에 발견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못한 사람들도 너무나 많더군요. 삶이 내게 허락해 준 수명이 생각보다 짧을까 봐 겁이 나요. 우리는 평생 겁만 내며 살아야 하나요? 사람 나름이죠. 시험날 밥이 안 넘어가는 저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군대 동기 중에 군대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을 걸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어도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추억이에요. 다르게 태어났으니, 불안을 감지하는 능력도 다른 거죠.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는 게, 저의 잘못인가요?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쩌겠어요? 하지만 개선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미얀마의 진흙을 맨발로 걸으면, 별 상상이 다 돼요. 진흑 속에서 뱀이 제 발을 꽉 물을 것만 같아요. 말레이시아의 제비집 동굴은 발 디딜 틈 없이 바퀴벌레로 빼곡해요. 땅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가득한 바퀴벌레 보신 적 있나요? 라오스에선 짚라인을 탔는데, 촬영 때문에 공중에 멈춰서 한참을 있어야 했어요. 대롱대롱! 제가 라오스의 안전을 얼마나 믿는다고, 떨어지면 즉사하는 곳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야 하냐고요? 이런저런 경험을 하다 보니까요. 불안도 무뎌지더라고요. 수상한 음식들을 그렇게 먹었는데도, 안 죽더라고요. 안 죽으면 됐지. 경험으로 학습되면, 낙척적인 태도가 가능해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운 거잖아요. 최악은 죽음이고요. 죽기밖에 더하겠어? 이렇게 약간은 포기하는 마음가짐이 돼요. 죽음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어떤 사람도 피해 갈 수 없다. 죽음의 시기를 고를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다. 살아 있는 동안만 살면 된다. 제 나름의 불안 대처법이에요. 발버둥을 친다고 물에 오래 떠있는 게 아니듯이요. 흐르는 대로 누워서, 떠있기만 하려고요. 그걸 순리라고 하지 않나요? 흐름에 맡기는 연습,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것,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 이런 생각으로 타고난 불안을 누그러뜨리며 살아요. 아예 안 불안할 수 없으니, 불안이 지나치기만을 기다려요. 불안도 지쳐서 오래는 못 맴돌더라고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좋은 글 말고, 따뜻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단한 글 말고, 소소한 글을 쓰고 싶어요. 약한 사람끼리의 연대와 응원을 사랑합니다. 요즘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지는 않나요? 누구 좋으라고요?


https://brunch.co.kr/@modiano99/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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