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항공권이 없어? 그러면 입국 금지

공항은 언제나 겁이 나요. 나는 언제나 어리석고요

by 박민우

2월에 다녀온 베트남 달랏 여행기입니다. 여행이 멀어져버린 지금 작은 숨통 같은 글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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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나가는(Out) 티켓이 있어야 해요.

-라오스행 버스 티켓이 있어요.

-이건 라오스에서 방콕으로 들어가는 티켓인데요.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걸까? 아제르바이잔으로 갈 때는 오늘날 비행기 표를 가는 날로 끊어서 몇십만 원을 날려 먹었다. 남들처럼 회사를 다녀? 아니면 학생들처럼 시험을 쳐? 왜 항상 멍청해져 있는 걸까? 사는 게 만만하냐? 긴장감이 하나도 없다. 남들은 먹고살려고 피똥을 싸는데, 버스 티켓 하나도 제대로 못 끊는다. 어느 나라나 입국이 까다로워지고 있다. 입국할 때, 출국할 표를 요구한다. 그래서 일단 버스표를 끊었다. 가지도 않을 라오스행 표다. 어쨌든 석 달 이상은 못 머문다. 석 달이 끝나기 전에 나가긴 할 것이다. 어디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보통은 베트남이다. 베트남이 아니었으면 한다. 일단 라오스로 가는 버스표를 인터넷으로 끊었다. 잘못 끊었다. 아오, 이 등신아.


뻔질나게 비행기를 타지만, 늘 공항이 무섭다. 발권이 안 됩니다. 이 말은 사형선고처럼 들린다. 거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지. 당신에게 비행기 티켓을 줄 수 없소.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인천공항이라면, 집으로 가면 된다. 집이 없는 나라에선,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럴 줄 알고(나는 늘 일정 비율의 멍청함을 유지하니까) 늘 공항에 일찍 온다. 비행기는 세 시간 후에 뜬다. 달랏의 공항은 작다. 공항 내로 들어가는 건 십 분도 안 걸린다. 버스 티켓을 끊었던 사이트는 24시간 상담이 가능하다. 페이스북 메신저로 물었다.

-예약을 잘못했어요. 방콕 출발, 라오스 비엔티엔 도착인데요. 거꾸로 했어요.

-알겠습니다. 조치를 취하고 연락드릴게요.

한 시간을 기다렸다. 두 시간이 남았다. 한 시간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다. 아니 삼십 분만 더 기다려보겠다. 죄송합니다. 취소는 불가능합니다. 이따위 메일이 온다면, 지금의 차분함은 없다. 물에 빠진 돼지처럼 발광할 게 뻔하다. 가방에는 늘 내 책이 한 권 있다. 책을 들이민다. 나는 여행작가요. 수상한 사람 아니고, 불법 체류자 아니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요(여러분은 못 본 척 지나가십니다). 그러니 발권해 주시오. 태국 관광청이 나를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른다오. 그런 식으로 몇 번 성공도 했다. 여행 유튜버나 블로거들도 비행기 티켓이 없어 즉시 비행기표를 끊어야 했다. 내가 뭐라고, 특별 대접을 기대해? 항공사 직원의 표정도 단호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흉흉하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데, 누울 자리가 없다. 십 분만 더 기다리자. 아니, 오 분만.

-이미 발권된 건 수정 불가입니다. 취소를 하고 새로 발권하세요.

오분 안에 일어난 일이다. 뇌에서 대혼란이 일어나기 전에, 답이 와주었다. 급할 거 없다. 서두를 것 없다. 머리가 하얘지면 뇌가 두부처럼 변하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는다. 다소 멍청했던 내가, 본격적으로 멍청하려 든다. 후우우, 하아아. 가장 쉬운 호흡부터. 취소하고, 새로 발권하기. 그게 뭐가 어렵다고. 가만. 진짜로 라오스 갈 거야? 그럴 마음 없다. 그런데 왜? 버스 티켓이 싸다. 취소하면 된다. 취소가 안 돼도 삼만 원 조금 넘는 돈이다. 거짓말을 쉽게 생각한다. 안 그래도 무면허로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로 싸돌아다녔다. 대단히 유명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한 번에 터질 악행들이다. 불쌍해 보여서 욕을 덜 먹는 중임을 안다. 내가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오, 그러고 보니 정말 많다. 흘려들었다. 왜 흘려듣게 되냐면, 내 처지가 비루해서다. 나처럼 살까 봐 마음이 무겁다. 이제 글을 쓰고, 여행책을 내는 작가들이 나를 신처럼 떠받들면 착잡해진다. 떠받들어지는 건 좋지만, 나처럼 살아선 안 된다. 매달 백만 원 이상은 벌었으면 한다. 그래, 진짜로 갈 곳을 검색하자. 어디? 어떤 곳이어야 하지? 가고 싶었던 곳이어야지. 통장엔 이백만 원 가까이 있다. 보기 드물게 부유한 상태다. 배가 불렀다. 이백만 원이 있으니 오백만 원이었으면 좋겠다. 빚 안 지고, 코카서스 여행기를 내고 싶다. 그러려면 오백만 원이 필요하다. 벌써부터 탐욕 돼지가 되어서, 오지도 않은 석 달 후를 걱정한다. 이렇다니까. 더 흉한 탐욕 돼지가 되기 전에 이 돈을 써야 한다.

-부자가 되긴 글렀는데,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 거야.

누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더라? 친구였나? 용하다는 점쟁이였나? 점을 치러 다닌 기억은 없다.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은 확실하다. 이십 대의 나는 야심가였다. 성공을 확신하는 청년이었다. 야심도, 건강도, 돈이 굴러가는 게 보이는 통찰력도 누구보다 뛰어났다(고 믿었다). 대기업 인턴십을 밟는 명문대생 특유의 싹퉁머리 없는 밝음이 내게도 있었다. 그런 놈들 중에도 내가 더 잘났다고 늘 주입식으로 떠벌리고 다녔다. 미아리에 살고, 부모님 가방끈은 짧으시지만 나는 다르다. 개천의 용이 될 것이다. 강남 친구들이 많은 것도 증거다. 나는 강남이 어울린다. 미래의 재벌한테 뭐? 출세를 못 한다고? 부자는 글렀다고?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아말피로 시작해서, 우크라이나를 잠시 갸우뚱한 후에, 포르투갈로 포르르 내가 착륙한다. 부러운 사람이 있나? 없다? 더 행복하고 싶나? 불가능하다. 당장 공항에서 묶일 수도 있다. 그런 강박의 상황에서, 나는 스마트폰을 켜고, 항공권을 찾는다. 에어 프랑스. 왕복 구십만 원. 오는 비행기는 새벽. 전날부터 공항에 와 있어야 한다. 클럽에서 밤새 춤추다가 허겁지겁 새벽 택시를 타는 상상을 한다. 불가능하다. 체력도, 열정도 없다. 혹시 모르지. 가봐야 안다. 5월은 포르투갈이다. 5월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젊어질 수도 있다. 출세도, 돈도 다 글렀다고? 틀렸다. 출세도, 돈도 큰 의미가 없음을 아는 이에겐 온다. 나는 완벽하다. 싹퉁머리 이십 대 박민우는 지금의 내가 불만이겠지. 지금의 나는 이십 대의 내가 불만이다. 격렬히 두근거린다. 설마 내가 포르투갈에 있을까? 말도 안 되는 기적이 분명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삶이라니. 내가 이런 사람이 됐다. 박민우보다 더 부러운 사람이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는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오늘 하루는 어떠셨어요? 저의 글로 약간은 더 재미난, 혹은 아늑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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