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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02. 2024

위기는 기회의 동의어(ft.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잠수)

런던 7일 차 - 2024년 1월 14일

짧았던 다니엘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날. 드디어 새로운 숙소에 둥지를 틀며 캐리어에 잠자코 있던 짐을 다 풀고, 와서 쌓인 묵은 빨래도 하고, 무엇보다 이미 아주 익숙해져 버린 혼자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을 기대에 설렘이 묻어 있다. 매우 아쉽지만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아니란 걸 알기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또 만날 수 있기에. 이 헤어짐에 너무 많은 감정을 부여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식사. 여자친구와 결혼을 고민하는 다니엘의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브렉시트 이후 유럽 사람들이 영국에 와서 거주하는 게 전처럼 쉬운 일이 아니게 됐는데, 저 동아시아 어드메에 있는 한국인과 동일한 취급(?) - 무비자로 일 년에 최대 6개월 영국에 체류 가능 - 을 받는 게 영 어색한 모양이다. 본인은 영국에 정규직을 가지고 있으니 체류에 문제가 없으나 똑같이 이탈리안인 여자친구가 영국에서 사는 건 정규직을 갖지 아니하고서는 불가능하단다.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일자리를 찾아 영국에 정착하는 방법보단 수월하겠지만, 부부가 모두 외국인(이탈리안)이기에 배우자 비자를 받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라 당분간은 롱 디스턴스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무엇보다 자신은 싫증을 금방 느끼는 터라 혹시나 어디선가 더 좋은 교수직 오퍼를 받으면 훌쩍 떠나려는 마음도 있다고 했다. 비자도 비자지만 내 볼 땐 아직 어딘가에 정착할 마음이 없는 것 같소만!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가 봐.


나를 두 밤이나 묵게 해 준 다니엘의 게스트룸 안녕!


작지만 귀여운 집안 구석구석과도 인사를 나눈다.


돌아갈 날이 되니까 날씨가 더 환상적이 됐다. 써니하다는 어제 날씨보다도 구름이 반 이상 더 걷혔다. 어제 날씨가 오늘 같았어야 했는데.. 하며 속상해하는 다니엘을 위로했다. 아직도 왼쪽에 조수석이 있는 건 어색하단 말이야.. 왼쪽에 앉았으면 자고로 핸들을 잡아야 쓰는디..


티켓을 예매하면서도 갸웃했던 건 런던행 기차의 요상스러운 루트다. 분명 더럼에 올 때는 직통열차를 타고, 좌석 지정까지 해서 편히 왔는데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은 환승도 해야 하고 자리 지정도 안 되더라니, 이번 주말은 런던으로 향하는 직통열차가 없을 예정이라는 안내문을 발견했다. 지난 주말 파업 때문에 많이 불편했다고 하더니 이번 주말도 마찬가진가 보다. 셰필드에서 한 번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환승이야 아무렴 상관없지만 30kg의 짐이 여러모로 주저하게 한다. 흠.. 다음 유럽 여행은 가벼운 옷을 가지고 다닐 수 있을 때 오자.


다니엘 안녕! 더럼 안녕! 열차의 좌석 지정이 안 되는 탓에 눈치껏 빈자리에 잘 앉아야 한다. 정말 운 좋게 두 열차 모두 나의 행선지까지 빈자리가 있었다. 다년간 다져온 빠릿빠릿한 눈치가 몸을 편안히 하는 데에 큰 몫 했다. 셰필드에서 환승하는 기차 간 시간 여유가 있길래 역에서 라테 한 잔을 사는 여유도 부렸는데 오감을 곤두세우지 않았다면 근 두 시간 반 동안 꼼짝없이 서서 가야 해 고통스러울 뻔했다.


이제 런던으로 돌아가서 남은 시간은 에어비앤비에서 보낼 예정. 런던에서의 생활이 단순히 관광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숙소를 성심성의껏 골랐다. 호텔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붕 떠있는 느낌인데, 여행은 살아보는 거라던 에어비앤비의 카피처럼 어딘가에 두 발 붙이고 서 있는 경험을 하고자 함이다. 예약할 때부터 체크인을 해야 하는 오늘까지도 호스트가 아무런 답장을 안 했다. 혹시 몰라 어젯밤 자기 전에도 한 번 더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나 예약 리퀘스트와 함께 메시지로 호스트와 소통해야 하는 에어비앤비 시스템 안에서도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는 호스트가 약간 싸했지만 애써 좋게 생각했다. 아직 일정이 한참 남아서 그런 거고, 체크인은 오후 세 시 랬으니 그즈음이 되면 연락을 줄 거라는 차분한 행복 회로를 돌렸다. 기차에 내려서도 답이 없어 일단 숙소 앞까지 갔는데,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직감하고 바로 고객센터로 연락했다. 호스트가 아무런 연락을 받지 않으니 고객센터에서 한 번 체크해 보라 일렀다. 한 줄기 희망은 고객센터에 맡기고 새로운 숙소를 찾기 시작한다. 오늘부터 보름간, 그것도 지금 당장 체크인이 가능한, 원하는 컨디션의 숙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원래 묵으려 했던 동네보다도 훨씬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가 그나마 나아 보여 그곳을 봐 두었다. 아직까진 공식적으로 바람맞기 전인 숙소 문 앞에 서서 40분쯤 기다렸나 보다. 고객센터에서도 호스트와 연락이 안 된다는 전화가 온다. 너무 미안하다고, 혹시 숙소를 환불하고 다른 곳을 찾아보겠냐는 제안에, 아까 봐 둔 곳이 있어 거기에 지금 바로 예약 요청을 보낼 테니 너네도 새 호스트에게 연락해서 내 요청을 즉시 수락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힘이 탁 풀린다. 너무 춥고, 빨리 어딘가에 들어가서 짐을 풀고 싶은 마음뿐이다. 심지어 오늘 저녁에는 사이먼 래틀 경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오페라 공연을 예매해 뒀단 말이야.. 얼른 체크인하고 옷 갈아입고 바비칸 센터로 가야 한다는 일정이 나를 안달 나게 한다.


생각해 보니 점심도 라테 한 잔으로 때우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구나. 급격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입맛은 뚝 떨어졌으나 일단 코스타에 들어와서 햄 치즈 샌드위치와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인다. 새 호스트는 내 예약을 수락했지만, 방을 치워야 한다고 지금 당장 체크인하는 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 7시 반에 오페라 공연 갈 건데 가방만 놓고 나오면 안 될까? 했더니 사실 아파서 지금 병원이야. 오늘 밤늦게 아니면 체크인이 어려울 것 같은데..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해서 나를 당황시켰다. 때마침 고객센터에서도 전화가 온다. 호스트가 병원에 있어서 오늘 하루만 다른 데서 자야 할 것 같다고.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상관할 필요 없이, 적어도 너는 내 연락에 답장을 주잖아. 내일 몇 시에 오면 된다고 얘기해 주잖아. 오늘 잘 곳만 찾고 내일 가면 되는 거야. 펄럭이는 마음을 다독인다. 영국에 와서 그 어떤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통화하고 문자 한 에어비앤비 상담사 Sally 양 고맙습니다...


근처 에어비앤비를 찾다가 또, 호스트의 수락과 연락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지치게 한다. 이 실랑이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그저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근방 호텔을 찾아 무작정 들어왔다. 혹시 오늘 밤 묵을 방이 있나요. 예약은 안 했어요. 어라.. 이거 뭔가 익숙한데. 곰곰이 생각하니 내 로망 중 하나였잖아?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이 누군가 - 주로 남주 - 와 대판 싸우고 대책 없이 집을 나와 호텔로 향해서 오늘 하룻밤 묵을 방 있는지 리셉션에 물어보는 거. 물론 내겐 사랑싸움 따윈 존재하지 않지만. 이렇게 로망을 실현하고 싶던 건 아니었는데, 이게.. 되네?


애초에 사이먼 래틀 경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오페라 같은 건 내 것이 아니었나 보아. 오페라 공연을 저 멀리 날리고 안정을 찾고자 들어온 펍은 온통 만석이다. 아.. 오늘 일요일 저녁이었지. 그럴 만도 하지. 바에 서서 맥주를 한참 마시다 테이블 자리가 보여 냉큼 앉았다. 혼자 여행 다니면 불편한 점 : 내 사진을 안 찍는다. / 혼자 여행 다니면 좋은 점 : 내 사진을 안 찍는다. 그래서 매일 똑같은 옷 입어도 아무도 모른다 ㅋㅋㅋㅋㅋ 얼른 저 스트라이프 티 빨고 싶다.. 얼른 내 숙소 들어가고 싶다.. 주인공이 역경을 겪지 않는 드라마는 재미가 없으니, 이번 여행이 재미있기 위한 가장 큰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야지.


한숨 돌리고 차분히 앉아 오늘을 되풀이한다. 이 모든 과정을 겪는 동안 놀랍도록 화가 안 났다. 묵묵부답인 호스트에게조차 분노하지 않았다. 나를 좀 봐 달라 소리친 많은 요구들이 좌절되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선을 끌고자 노력하던 어린이로 존재했을 뿐이었다. 바쁜 일이 있었을 거야, 늦은 시간이라 그런 걸 거야, 체크인 시간이 다 되면 연락을 줄 거야, 영국 번호로 전화를 하면, 문자를 하면, 왓츠앱을 보내면, 고객센터에서 전화를 하면... 나를 봐줄 거야. 당장이 아니더라도 혹여나 돌아볼 당신의 시선에 비칠 내가, 눈길이 갈 만큼 완벽한 모습으로 자리할 수 있게 나를 가꾸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던 어린이에게 이 정도 좌절쯤이야. 스스로 일어나서 무릎 팡팡 털고 대수롭지 않게 걷는 건 익숙한 일이다.


평온함 속에선 절대 깨닫지 못할 심연의 마음을 마주한다. 극한의 위기는 깊은 감정을 꺼내어 볼 기회다. 정신이 사납고 마음이 수고롭고 계획하지 않은 돈을 한 아름 썼더라도, 몸 뉘일 곳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무사히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이참에 돌발 상황을 어여삐 돌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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