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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09. 2024

조약돌 마음

런던 12일 차 - 2024년 1월 19일

이제야, 마음이 런던이라는 새로운 장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시간을 지나 평정해지고 그 안에서 자신의 루틴을 지킬 때 비로소 이곳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는 안도가 찾아온다. 이 나라에 며칠만 머물다 가는 단순한 여행자가 되지 않으려 애썼던 건 이들과 함께 한다는 동질감을 통해 안정을 유지하려는 성향 탓이다. 곱씹어 보니 소속에의 깊은 갈망은 평생을 함께 한 친구다. 어딘가에 귀속되길 바라며 모든 것을 거머쥐려 했던 것이었다. 가장 불안할 때 제일 많이 소비했다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숙소 앞에는 아주 큰 Sainsbury's 마트가 있다. 생수를 사러 갔다가 이것저것 담았다. 예전에 자주 사 먹던 위타빅스를 찾아보고자 들른 시리얼 코너에서 오티빅스라는 신상품을 발견했다. 현미로 만든 위타빅스에서 진화해 오트밀로 만든 오티빅스까지 나오다니. 포장을 뜯으면 마치 소여물처럼 생긴, 아주 잘게 바스러지는 큐브 모양을 하고 있다. 여기에 아몬드 우유를 부으면 금세 죽처럼 꾸덕꾸덕해지는데, 밍밍한 맛인데도 계속 손이 간다. 한국에는 아직 정식 수입이 안 돼서 직구를 해야 하는 너란 아이. 즐길 수 있을 때 맘껏 누려주겠다.


사실 어제 리젠트 파크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면서 러닝 하는 사람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추위에 반팔, 반바지만 입고 뛰는 사람도 있고. 평일 낮인데도 러닝 하는 사람들의 모양새는 아주 다양하더라고. 저들의 일상이 부럽다는 데까지 가닿자 나도 하면 되지! 하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리젠트 파크는 지하철 환승을 해야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므로 잠시 주저했지만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냥 가기로 했다. 운동복 입고 잠깐 지하철 타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영하 2도의 달리기는 예상보다 훨씬 할 만했다. 공원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 예쁜 원이 그려지진 않았기에 아쉬웠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떠나기 전엔 꼭 런던 시내도 달려보기로.


러닝을 마치고는 쿨다운도 할 겸 슬슬 걸어서 숙소까지 간다. 한 도시를 면밀하게 알 수 있으려면 걷는 게 최고다.  와~~ BBC다.


이렇게 사람 많고 북적이는 옥스퍼드 서커스에 땀샤워 한 운동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나.. 꽤 자연스러웠을지도..?


숙소에 가는 지름길은 버킹엄 궁전 앞을 지난다. 러닝의 열기가 식고 땀이 마르면서 으슬으슬 추워지고 있어서 아무 고민 없이 지름길을 택했는데, 유독 궁전 앞에 사람이 너무 많은 거다. 심지어 온 사방에 경찰들이 한가득 있어서 설마 교대식인가.. 했는데 정말이었다. 인파에 북적이는 장소를 선호하지 않아 교대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뜻밖의 순간에 근위병 교대식을 보게 되다니. 잠깐 구경하고 가던 길 가려고 했으나 교대식이 시작하면 아예 옴짝달싹 못 하게 이동을 통제하기에 꼼짝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됐다. 말 타고 호위하는 경찰 얼마나 멋있게요..?


오늘은 첼시 쪽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고즈넉하고 포근한데 마냥 조용하지는 않은, 적당히 북적이고 무던한 동네가 퍽 마음에 든다. 사치 갤러리 앞 요크 스퀘어에 앉아 뛰노는 아가들을 한참 바라보다 일어났다.


오후 네 시 남짓이면 이렇게 예쁜 노을을 볼 수 있다. 오전 시간을 부지런히 보내지 않으면 유독 하루가 짧은 느낌이다. 저무는 해를 보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었는데. 얕게 내린 뿌리가 안정의 물을 맛보자 어둠을 탐색하는 여유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배는 고픈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영국에선 펍만큼 시간 때우기에 용이한 장소도 없는 것 같다. 영국에 온 이래 처음으로 수첩과 펜을 꺼내 생각을 정리한다. 금요일 저녁이라 왁자지껄한데도 영어는 - 특히 영국 악센트는 - 무의식에 꽂힐 만큼 익숙한 언어가 아니다 보니 신경을 끄면 얼마든지 나만의 결계 속에 들어앉을 수 있다. 대본도 읽고 글도 써보겠다고 어딜 가나 아이패드를 들고 다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각사각 손으로 필기하니 사고의 확장이 십분 유연해짐을 느낀다. 오래도록 싸매던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드디어 찾은 것 같다.


생경함이 주는 감정을 빈틈없이 알아본다. 자신이 이 정도로 음식에 무던한 사람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맛있는 식사는 언제든 환영이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간단한 메뉴로도 얼마든지 자족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울에서의 생활에 식사 약속이 주를 이뤘던 건 사람들과의 연결을 바라온 데서 연유한다. 끈끈한 인적 네트워크 속 한 부분을 차지함으로 인한 소속감을 갖기 위함이다. 고군분투의 양상은 서울이냐 런던이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애쓰는 빈도와 강도는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 결은 동일하다. 그 말인즉 나에게 있어 여유는 넉넉한 시간이 아니다. 한 달의 휴가가 주어져도 무언가에 쫓기듯 떠나오게 된 건 그 때문이다. 부재 때문에 속한 곳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불안이 전전긍긍하게 했다. 내게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온전한 수용을 체감할 때 마침내 기인하는 게 여유인 것이다.


지난 일 년간 달력을 꽉 채운 식사 약속을 반추한다. 간절함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일정들을 반짝이도록 하나씩 차근히 빚어 본다. 혼자 뚝 떨어져 있어야 그제야 보이는 마음의 작은 조약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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