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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06. 2024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런던 11일 차 - 2024년 1월 18일

분명 내가 맞다고, 옳은 선택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그럼에도 의심이 밸 때가 있다. 에어비앤비에서 나오기로 선택한 건 단순 변심이기에 환불은 전적으로 호스트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호스트에게 물어보았더니 환불해 주기 싫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고객센터의 연락을 받고 그랬다.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 집을 뛰쳐나오긴 했지만서도 약간의 인정을 기대했었나 보아. 열나흘의 예약 중 단 하룻밤만 묵었을 뿐인데, 부분 환불마저 되지 않는다는 건 자신의 판단력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영국에서의 매일을 SNS로 가감 없이 나누면서 좋은 점은 혼자여도 함께 있다는 것. 흔들리는 나에게 든든한 심지가 되어주는 친구들 덕에 선덕거리는 마음을 쓸어내린다. 괜찮아! 유럽 와서 명품 가방 하나 샀다고 생각하면 되지 뭐! 그런데 실체는 없는 어떤 그런 투명한 가방.. 벌거벗은 임금님 가방.. 촤하하하하


떠들썩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엔 운동만 한 게 없지. 별거 없는 호텔 피트니스 센터이지만 덤벨이라도 들고 깨작거려 본다. 일상의 루틴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 중 하나다. 오늘은 다시 짐을 또(!) 싸서 방을 옮기는 날. 그제, 어제는 런던에서 구글 콘퍼런스가 열려 온 사방 호텔이 전부 만실이었다. 그 덕에 혼자서 트윈베드 룸을 쓰는 진귀한 경험을 했지 뭐야. 욕조도 있고 나름 괜찮다 생각한 방이었지만 트윈베드가 영 불편해서 바꾸기로 했기에 풀어두었던 짐을 전부 거두었다. 여전히.. 많다..


방이 준비되는 동안 리젠트 파크로 향했다. 청명한 겨울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햇살의 리젠트 파크는 평온함 그 자체.


무계획 중의 무계획으로 떠나온 이번 휴가에서 유일한 계획은 햇살 가득한 리젠트 파크에서 Bruno Major의 Regent’s Park를 들으며 하염없는 시간을 보내는 거였다. 어릴 적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질 만큼 보고 또 보던 <101마리 달마시안>에서 퐁고와 퍼디가 처음 만났던 거기. 로저와 아니타가 호수에 빠졌던 바로 거기. 그곳에 내가 있다. <101마리 달마시안>의 도입부에 로저가 작곡하던 곡을 샘플로 해서 Bruno Major가 Regent’s Park라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 노래를 들으며 애정하는 영화를 상기하는 순간이 아주 황홀하다. 어쩌면 십 년 전 영국을 왔던 건, 그리고 지금 다시 런던에 오고 싶었던 건, 유년 시절의 추억을 곱씹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꿈만 같은 공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선망의 미소가 지어진다. 하다못해 잔디밭에서 주인과 공놀이를 하는 큰 개를 보면서도 그랬다. 십 년 전에 엑시터 공원 잔디밭에서 목줄 없이 뛰어다니는 개들을 마주하고 다음 생에는 꼭 영국 부잣집 강아지로 태어나야지 하는 상상을 했었다. 오늘 그 다짐을 구체적으로 수정했다. 다음 생에는 꼭 '런던'에 사는 부잣집 강아지로 태어나겠어.


리젠트 파크에서 한참을 앉아있어 꽁꽁 언 손과 발을 녹일 겸 찾은 Daunt Books. 메릴본에 있는 서점에 겸사겸사 왔다고 하기엔 꽤 먼 거리를 걸어왔지만 여기는 꼭 와보고 싶었다. <미녀와 야수>의 성 안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황홀한 공간. 할 수만 있다면 이곳 서점처럼 우리 집에도 벽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책장을 따라 복층으로 위치한 서가를 만들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나의 모든 로망은 디즈니가 만들어 준 것일까...?


런던 시내에서 한국 차가 자주 보이지는 않지만 얼마 안 되는 빈도 속에서도 니로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니로 연비가 좋다고 유럽까지 소문난 것인가...!!


그렇게 걷다 보니 위그모어 홀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런던에 와서부터 지금까지 좌충우돌을 겪으며 예매했다가 날린 클래식 공연만 세 개. 아까워 죽겠지만(특히 사이먼 래틀 경&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엉엉) 나와 인연이 아니었다고 위안을 해 본다. 위그모어 홀에는 다음 주에 올 거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않기로 해.


뭐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그것만 하는 사람... 사실 요즘은 한국의 식문화도 수준이 매우 높아져서 영국에 왔다고 특별히 이색적인 경험을 하긴 쉽지 않다. 여기서'만' 먹고 마실 수 있는 메뉴를 고민하지만 개중에 피시 앤 칩스가 제일 취향이라.. 의도하지 않았는데 런던에서 맛있다는 피시 앤 칩스 도장 깨기 하러 다니는 모양새다. 현지에서 먹는 기네스 생맥주는 Of Course!


한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피카딜리 극장에, 뮤지컬 물랑루즈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작년 이맘때 물랑루즈 한국 초연에 푹 빠져 블루스퀘어를 방앗간처럼 드나들었다지... 홍광호 크리스티안이 아니면 내게 별 의미 없겠지마는, 그래도 넘버를 거의 다 외우고 있기에 예매했다. 번안곡과 오리지널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기도 했고. 웨스트엔드 오리지널 공연(뉴욕 브로드웨이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어로 하니까 오리지널이라고 하련다)은 캐릭터가 가진 문화적 뉘앙스에 맞는 캐스팅으로 그 매력이 배가되는 지점이 탁월했다. 크리스티안은 미국에서 프랑스로 넘어온 가난한 뮤지션이니 미국 영어를 쓰는 미국인이, 백작은 영국인이, 파리의 가난한 음유시인인 툴루즈는 불어 악센트를 가진 흑인이, 산티아고는 외모부터 발음까지 전부 라티노인 배우가 연기하니 연출의 비언어적인 요소가 극대화된다. 아무래도 동양인의 외양으로 미국인을, 파리지앵을, 라티노를 표현하려면 의상부터 시작해서 헤어, 메이크업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데 거기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원어 곡을 번안할 때도 마찬가지. 영어가 주는 직설적이지만 유쾌한 농담들이, 번역하면 다소 오글거리게 다가오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럼에도 마르고 닳게 보던 한국의 물랑루즈 초연은 꽤 퀄리티 있다 여겼었는데.. 확실히 오리지널은 다르다.


홍광호를 좋아해서 뮤지컬이 좋았다고 기억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뮤지컬 물랑루즈를 사랑하는 거였다. 두 시간 내내 입이 귀에 걸리고 넘버를 속으로 있는 힘껏 따라 부르며 황홀함 속에 푹 절여져, 돌아가는 길엔 건들기만 해도 톡 바스러지는 야들야들한 마음으로 휘청거리었다. 오늘처럼 눈부실 만큼 찬란한 감정 뒤엔 언제나 외로움이 존재한다. 달뜬 가슴의 이면에는 이 근사한 경험을 나누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내가 있다. 함께 기억해 줄 이는 없지만 오늘의 뮤지컬만으로도 런던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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