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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05. 2024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

런던 10일 차 - 2024년 1월 17일

얼마 만에 맞는 수월한(?) 아침인가. 영국에 온 뒤로 휴대폰 알림을 전부 꺼놓고 지냈었는데 - 시차 때문에 영국 시간으로 주로 늦은 밤~새벽에 연락이 많이 오기에 - 요 며칠 모든 연락을 붙들고 있었다. 마음이 소란하니 온갖 세상 이야기가 궁금하더라. 이역만리 타국에서 혈혈단신 남겨졌다는 고통 속,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위안의 끄나풀을 잡고 있기 위함이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간 오늘에서야 다시금 알림을 꺼 둘 용기가 생겼다. 역시 평범함은 말이 없다. 지나고 보니 무난의 힘을 알겠다.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잔뜩 찌푸린 꾸물한 겨울 날씨를 만났다. 분명 예보 속 날씨는 영상 4도를 가리키고 있지만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유독 차다. 숫자만 보고 부피가 큰 패딩은 과감히 내려놓고 왔는데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패딩을.. 사야 할까...?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정오에도 속살을 파고드는 칼바람을 이기지 못한 점심 식사는 라멘이다. 진하게 우린 고기 육수보다 담백하고 깔끔한 국물을 선호하는 내게 라멘은 언제나 어려운 메뉴다. 그럼에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날씨에 들어간 라멘집에서 도통 어떤 메뉴가 좋을지 몰라 고민하다 직원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그의 추천은 탄탄멘. 메뉴가 나오자마자 풍기는 땅콩 향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땅콩보다는 아몬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묵직한 치킨 육수보다 해산물 혹은 채소 베이스의 음식을 좋아한다. 모든 것이 취향과 대척점에 있는 점심 식사를 통해 또 한 가지의 오답노트를 완성한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어 웨스트민스터 시내를 배회한다. 구글 지도가 안내하는 경로를 충실하게 따르지 않으니 런던아이, 빅벤,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기는 멋진 광경을 만나기도 한다.


May God grant to the living, grace to the departed, rest to the church & the world, peace and concord and to us sinners eternal life.


웨스트민스터 사원 바로 앞에선 졸업식이 한창이다. 학사모를 쓴 아가들과 가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북적거리는 모습은 보기 좋더라-


조금 더 걸어가면 빅벤이 있는 의회 건물이 나온다. 여기까지 갔다가 너-무 추워서 날씨에 항복하고 이만 퇴각하기로. 숙소까지 한 시간은 걸어야 했으나 목적지가 있는 걷기는 즐겁다.


잠깐 몸을 녹이고자 들어온 숙소에서 이내 결심을 바꿔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내게, 런던까지 와서 숙소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다면 너무 아깝지 않냐는 마음의 소리가 새어 나온다. 서울에서의 루틴 그대로 살고 있으니 충분히 그렇게 여길만 하다. 그러나 열네 시간이나 날아와서 겪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엔 깊은 사색이 묻어 있기에 아쉬워하지 않기로 한다. 요 며칠 벌어진 에어비앤비 사기로 겪게 된 일련의 사건들 중 가장 괴로웠던 건 나만의 공간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미처 의식하지 못한 심연에는 자신의 공간에 큰 의미를 두는 내가 있다. 온전한 취향이 반영된 나만의 영역을 통해 안정감을 느낀다. 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건 이 때문이었다. 편리라는 명분으로라도 나의 물건들을 가져와 배치해야 안취할 수 있다. 프리랜서 계약직 시절 신분의 불안함을 배가시킨 건, 재택근무를 주로 하는 팀원의 자리를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 상기하는 비(非)소속의 현실이다. 고스란히 소유해야 안정을 느끼는 성향에서 비롯된 심란함이다.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른다. 짧지만 긴 휴가는 깊은 마음을 한 번 더 둘러보기에 적절하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생각하고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늦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자연스럽게 오게 된 건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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