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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12. 2024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런던 13일 차 - 2024년 1월 20일

런던에서 맞는 첫 주말. 지난주 주말은 다니엘과 함께 더럼 시내를 구경하고 있었구나. 평소 일상에서 주말은 꼭 집 안에 콕 박혀있는 날이었는데 여행이라고 크게 다를 리 없다. 주말은 어딜 가나 인파에 휩쓸려 커피 한 잔 마시기도 쉽지 않은 날이라 상상만 해도 부산스럽다. 그래도 평소와 다름없이 명상, 일기까지 즐거운 새벽 루틴 보내고 밀린 빨래를 한다. 혹시나 손빨래를 해야 할까 싶어서 손빨래 전용 세제를 챙겨 왔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미온수에 세제를 풀어 담가놓기만 해도 빨래 끝!


어제의 러닝이 황홀한 기억으로 남아 오늘도 달렸다. 매일 똑같으면 금방 익숙해지니까, 어제와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구름이 해를 가렸지만 되려 푹한 오늘 날씨는 러닝 하기 최적이다. 주말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런던 동물원을 방문하는 가족들, 아가들의 각종 스포츠 경기를 위해 온 가족이 총출동해 빼곡한 주말의 공원 풍경은 어제와 사뭇 다르다. 그저 하룻밤의 차이일 뿐인데 또 새로운 모습이 된다. 온전히 그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는 러닝 시간이 귀하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 같은 건 차치할 수 있다. 바로 지금에 발 딛고 있다는 느낌이 러닝을 지속하게 하는 이유다. 리젠트 파크 한 바퀴를 뛰면 딱 5km를 채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5km에 약간 못 미치는 거리가 어설퍼서 귀엽다.


돌아와서는 어제저녁에 준비해 둔 Marks&Spencer 파스타 샐러드와 사과로 점심을 먹는다. 레디밀인데 퀄리티가 꽤 괜찮다. 이 정도로만 먹어도 충분한 나의 점심. 서구권에서 재배되는 핑크 레이디 사과 품종이 맛있다고 해서 한 개 베어 물었다. 한국 사과는 크기가 커서 한 개 다 먹기 쉽지 않은데, 핑크 레이디는 오렌지보다도 작으니 한 끼 식사에 곁들이기 딱 좋다. 기억하고 있는 사과 맛보다는 덜 상큼해서 비교적 달달함이 더 느껴지고, 과육이 쫀쫀하다. 아래 앞니가 성치 않아 보철을 해 뒀기에 앞니로 와그작 하는 건 웬만하면 지양하는데.. 칼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살살 베어 먹었다.


몸이 주말을 기억하는 것일까? 딱히 어딜 가고 싶지도, 특별한 걸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관성이 눌러앉게 했다. 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속절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나중 되어 이렇게 보낸 지금 이 시간을 후회로 기억할까 봐 두려움이 엄습한다. 분명 내가 정의하는 내 생각인데 지금의 마음을 충분히 누리고 있으면서도 만약을 걱정하는 것이다. 회한스러울 미래를 지금부터 우려하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


그래서 외출 채비를 해 펍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귀찮아서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의 최대치가 걸어서 5분 거리의 동네 펍이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마주할 일이 겁나는 통에 떠밀려 나온 셈이다. 어제저녁을 먹었던 펍에 앉아 기네스만 두 잔을 마셨다. 안주는 온갖 고찰이다. 그 무엇이든 단단한 심지를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매력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로서도, 나의 페르소나로서도, 작품으로서도 오롯이 설 수 있으려면 코어가 굳건해야 한다.


여행이라고 해서 특별함으로 일상을 거스르기보다는 나의 흐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여행이 너무 좋아 일상을 여행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곤 했었는데. 여행에서 일상을 사는 지금, 원하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나다운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편안히 흘러가는 오늘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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