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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13. 2024

오히려 좋아

런던 14일 차 - 2024년 1월 21일

안전지대를 벗어나자는 구호 하나로 여기까지 왔건만, 주말의 북적임이 달갑지 않다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채비를 한다. 리젠트 파크의 평일과 주말이 다르듯, 평일과 주말의 도시는 확연히 다를 테지. 분명 휴가를 준비하며 일정을 머릿속에 그릴 때는 세 번의 주말이면 충분하고도 남겠다 여겼었는데 두 번의 주말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 내게 남은 주말이 한 번밖에 없다는 사실은 괜히 서운하다.


참 감사하게도,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비 예보다. 저녁에는 비가 예정되어 있음에도 포근한 날씨인 와중 한파와 폭설로 고생한다는 고국의 소식에 이내 멀리 나왔구나, 싶다. 런던은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분다. 이러다가 온통 다 날아가는 거 아닐까 싶을 만큼.


지난번 빅 벤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지 못한 게 영 아쉬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말이니까, 내 사진을 찍어 달라 부탁할 관광객이 많지 않을까 싶어 선택한 전략이다. 대충 경로만 확인하던 지도를, 멈춰 서서 요리조리 뜯어보던 참이다. 바로 앞에 있는 시계탑이 'Little Ben'이란다. 새로이 발견한 런던의 귀여움 추가.


이윽고 목도한 빅 벤 앞에는 온통 사람들로 빼곡하다. 사진을 부탁할 사람은 많았지만 바람이 워낙 거세어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하찮은 사진을 한가득 안았다.


처음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던 그날처럼, 목적 없이 트라팔가 광장 - 내셔널 갤러리 - 피카딜리 서커스까지 쭉 걸었다. 레고 스토어 앞이 인산인해이길래 나도 슬며시 줄 서서 입장했다. 레고를 구경한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즐겁더라. 피카딜리 광장에 삼성 광고 나온다고 괜히 삼성 걸즈 친구들에게 삼성의 위상을 자랑도 하고(?). 몸속에 파란 피가 흐르는 거늬의 세포들은 부끄럽다고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지.


만 보는 걸었나 보다. 돌아가는 건 버스를 타기로 한다. 정류장도 잘 찾고 금방 타야 할 버스가 온다고 하기에 오매불망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저 앞에 있는 저 버스를 타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앞을 휙 지나가는 같은 노선의 버스. 엥..? 눈여겨보던 버스는 주르륵 미끄러져 반대편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차. 여기는 우 핸들의 좌측통행 나라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왼쪽에서 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것. 길을 건널 때에는 오른쪽부터 보아야 하고, 버스가 오는 건 오른쪽을 봐야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자각해도 잠깐으론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결국 버스를 놓친 우측통행 나라에서 온 나는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1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꽤 늦은 오후임에도 아직 하우스키핑 청소가 안 되어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와 근처 펍으로 향했다. 펍 마저, 북적이는 주말 낮의 풍경은 평일과 사뭇 다르다. 평일에는 피곤한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얼큰하게 수다 떨러 오는 느낌이라면 주말에는 부부동반 모임, 축구 보러 온 노신사들, 친목을 위주로 한 모임의 성격이 강하다. 맥주 한 잔씩 손에 들고 수다 쿠키 구우며 축구 경기에 눈을 떼지 못하는 모양은 상상하던 영국인의 모습 그 자체.


오늘을 제외하면 내게 남은 일요일이 하루밖에 없다는 현실은 오늘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가닿게 한다. 딱히 식사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일요일에'만' 먹을 수 있는 선데이 로스트 메뉴를 주문했다. Roast Sirloin / Chicken / Vegetable 중 오늘의 기분은 치킨이다. 특별히 새롭거나 맛있음을 기대할 메뉴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오븐에 구운 치킨을 먹게 되어 좋았다. 목표했던 대로 원 없이 마시고 있는 기네스 생맥주... 최고야...


사진만 보면 자정 같은데. 고작 저녁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펍에서부터 비가 세차게 내리더니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강풍이 비 때문인지 훨씬 더 거세졌다. 한참 걸어가는 등 뒤로 바람이 불어오는데 어찌나 강력하던지 덕분에 종종걸음을 걷게 되더라. 순풍에 돛을 단 듯하다 는 말뜻을 체감했다. 정말 하늘이 도와주는 일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도 하는구나.


오늘은 12 ensemble 공연을 보러 위그모어 홀에 왔다. 위그모어 홀은 만 35세 이하라면 공연을 5파운드에 볼 수 있는 특별 할인이 있다. 19:30 공연이라 넉넉하게 도착했는데, 아무리 궂은 날씨라고 해도 그렇지 번화가가 너무 조용하길래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일요일은 하나같이 18시면 문을 닫는구나. 새롭게 깨달은 주말의 런던 풍경.


내부는 매우 앤티크 하고 자그마한 위그모어 홀. 공연장이라고 말 안 하면 성당이라고 해도 믿을 만하다. 임윤찬의 피아노 리사이틀 라이브 영상으로 보았을 땐 이 정도로 작아 보이지 않았었는데. 기대보다 아담해서 매우 귀여웠다.



이런 종이 티켓 사랑하는 나.. 기차 티켓도 뮤지컬 티켓도 전부 모바일이라서 은근히 아쉬웠는데 이렇게 꼼꼼하게 종이 티켓 챙겨주는 위그모어 홀 사랑해요. 사실 프로그램이고 뭐고 숙고하지도 않은 채 일단 시간 맞는 건 예매했기에 제목대로 앙상블이라는 것 말곤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의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 듣는 곡. 그나마 아는 건 쇼스타코비치인데 묘하게 러시아 작곡가 음악이 어렵게 느껴져 선호하지 않았던 편식쟁이는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봤을 리 없다. 오케스트라가 아닌 앙상블로도 피아노 협주곡이 된다는 게 놀랍고 트럼펫이 메인 선율을 연주한다는 건 더욱 생경했던 피아노&트럼펫 협주곡. 이어진 쉬닛케의 현악 4중주가 라수스와 베토벤의 곡을 퍼즐처럼 엮어 놓은 곡이라 이어서 라수스와 쉬닛케의 곡을 한 프로그램처럼 연주하겠다고 설명하는 첼로 오빠.. 젤 멋있어..


어쩌다 취향이 아닌 러시아 작곡가 프로그램으로만 구성된 공연을 보게 됐다. 물론 아직도 어렵고 직관적인 이해가 부족해 한 번의 경험으로 러시아 음악의 감성이 가슴 깊이 와닿진 않지만, 돌아오는 길에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계속 듣고 있는 걸 보면 꽤 인상적이었음이 틀림없다. 의도한 것과 정 반대로 흘러간다 해도 그 안에는 얼마든지 값진 순간이 있다. 오히려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Stormy Night임에도 불구하고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첼로 오빠의 말에, 영국인들은 호들갑이 심하네.. 겨우 이 정도 바람이 폭풍이라고? 했는데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천둥 번개를 동반한 바람 소리가 거세진다. 아.. 폭풍우 맞구나. 하늘은 나의 귀가를 기다려준 것일까? 영국에서도 사랑으로 보호받고 있음을 깨닫는 감사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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