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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14. 2024

동화나라에서 살기

런던 15일 차 - 2024년 1월 22일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는 말간 수채화 같은 풍경이 남았다. 아름다운 경치에도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다는 건 지금이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려나.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됐다는 말이려나. 약 반나절의 시차 덕에, 간밤엔 업무 연락이 잔뜩 쌓였다. 그 덕택에 월요일임을 실감한다. 미처 눈곱도 떼지 못한 상태로 작년의 성과를 반추하고 올해의 지향점을 분석한 자료를 검토하다 별안간 익숙한 현실을 목도했다. 아.. 나는 경주마처럼 달려 나가는 데에 능란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의도가 없는 일상이 어려웠구나. 그래서 더욱 목적 없는 오늘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 노력한다. 곧 환상 같은 동화나라의 꿈에서 깨어나야 할 테니.


떠나기 전에 꼭 런던 시내를 달리겠다는 다짐은 오늘로써 실현됐다. 이렇게 예쁜데 런던을 어떻게 안 사랑할 수 있겠어...! 템즈 강변을 달리는 건 상상보다도 더 황홀한 일이었다우. 공원 달리기에 비해 장애물이 많다 보니(사람, 횡단보도, 거센 바람 등..) 멈춰 서야 하는 지점 때문에 오히려 더 힘들다 느껴진 오늘의 러닝. 다음엔 아예 강변까지 걸어간 다음에 강변 한 바퀴만 달려볼까 생각한다. 매일 한강 달리기를 해도 이만큼 행복하려나.


의도가 없는 하루 속 새로운 목표를 만든다. 쇼핑을 좀 해볼까 싶어 주변을 돌아다닌다. 맑은 날씨에도 강풍은 계속되어 분명 따뜻한데 굉장히 쌀쌀하다. 몰아치는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여본다.


황홀경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누가 미끼 걸린 낚싯바늘을 바다에 던져 넣은 듯이 기억이 끄집어 올려졌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나는 왜 다시 이곳에 오겠다 약속했을까. 지키든 안 지키든 아무도 모를 나만의 약속을 가슴속에 담아 두며 부채감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일까. 대체 왜 영국이라는 나라를, 런던이라는 도시를, 숨 쉬듯 생활하는 일상으로 소유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언제든 특별하고자 했다. 대단한 사람, 특출 난 사람, 멋진 사람으로 주목받고 싶었다. 이상과 현실의 큰 격차는 나를 사랑하고 싶은 만큼 미워하게 한다. 바로 그때, 영국으로 왔다. 하루 걸러 비가 와도, 보름 동안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어도, 빅벤을 바라보며 있는 순간은 나를 특별하게 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함에도 영어로만 소통이 가능한 일상에 특별함을 느꼈다. 굉장한 노력으로 무언가를 성취해 내지 않았음에도 이곳에 놓여있다는 자체로 남다를 수 있다는 건 찬란한 경험이었다. 반년 남짓 쌓인 황홀한 감정은 영국이라는 두 글자 사이사이에 접착제처럼 붙어있다. 영국에 온다는 건 그 견고함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다. 다시 또, 큰 노력 없이 특별해지고 싶다는 갈망이다.


혹시나 누군가가,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서울에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런던에 와서 살게 해 준다면 여기로 올래, 따위의 질문을 던져 본다. 의외로 우물쭈물 고민하는 내가 있다. 정말 딱 이 년 전만 됐어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YES라는 대답을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함께다. 이러나저러나 런던에 있는 내가 특별한 것은 변함없음에도 고민이 된다는 사실은 퍽 놀라운 일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잃을 게 많아진다는 뜻인가. 여러 상념에 잠긴 동화나라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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