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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18. 2024

일상의 방점

런던 16일 차 - 2024년 1월 23일

삼 주 째 호텔 생활을 하면서 묘하게 붕 떠있다고 느낀 건 식사와 세탁을 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라 여겼다. 사실 이 두 가지 때문에 이번 휴가에선 꼭 에어비앤비에 묵겠다 다짐한 터였다. 여행이 아닌 일상을 보내고 싶었기에 그랬다. 그러다 오늘 기상 직후 무의식적으로 침구 정리를 하다 익숙함에 깜짝 놀랐다. 허전함의 근원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침구 정리를 하던 습관의 부재다. 굳이 내가 정리를 하지 않아도 새것처럼 정돈해 주는 서비스를 매일 받을 수 있는 덕에 게으름을 부린 게 일상에 구멍을 만들었다.


구름이 하늘을 빼곡히 뒤덮고 꽤 굵은 비가 내리는 아침. 우중 러닝은 여러모로 번거로운 점이 많아서(특히 빨래..) 오늘은 건너뛰기로 했다.


어느덧 차곡차곡 늘어나는 짐을 바라보며 잔뜩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걸 어떻게 다시 다 들고 가지. 아무렴 소모품과 버리고 갈 것들 위주로 가져왔다 해도, 장기 여행을 양해해 준 분들의 기념품까지 챙겨 가려면 공간이 한참 모자라겠는데. 가장 큰 패착은 옷을 너무 많이 가져왔다는 것이다. 더운 여름도 아니고 땀이라면 운동할 때 흘리는 게 전부라 이렇게 많은 옷이 없어도 괜찮았다. 여행 기록에서 단벌 신사처럼 보일까 '혹시나'하는 우려는 내려놓았어도 됐다. 어차피 외투는 하나라 이너를 매일 다르게 입는다고 해도 이미 단벌 신사이며, 또 평소처럼 매일 다른 옷을 입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겪어보니 알겠다.


무게는 물론이고 부피 면으로 봐도 아무래도 수하물로 전부 가지고 갈 순 없을 것 같아서 근처 우체국에서 한국으로 EMS를 부친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짐을 추려 골라 담았다. 서울에서도 한 달에 한 권 읽을까 말까 한 책은 무슨 자신감으로 네 권이나 들고 왔으며, 생전 입지 않던 원피스를 입어보겠다며 두 벌이나 챙겼고, 면세점에서 사도 됐을 기념품은 '혹시나'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내에서 미리 사 뒀는지... 올 때도 초과 수하물 비용 내고, 갈 때도 곱절로 돈 들여 돌아가는 나는.. 대체 왜 이런 걸까? 그놈의 '혹시나'가 발목을 잡는다. 자승자박이다.


처음 겪는 영국 EMS 접수에 우왕좌왕하다 우체국에서 무려 한 시간 반을 보냈다. 가장 큰 상자가 코딱지만 해서 여러 개에 나눠서 포장하기, 포장을 잘못해서 다시 뜯고 재포장하기, 상자에 받는 사람 주소 & 반송 주소를 적으라고 했는데 통관 종이만 적으면 된다고 알아듣고 접수했다가 상자마다 전부 주소 적기, 상자마다 내용물 정확하게 해야 한다 해서 일일이 확인하기까지... 진땀을 쏙 빼고 나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하도 시달려서 배도 안 고프네...


귀국할 때까지 꼭 완성하겠다 다짐한 업무가 있다. 비도 오고 어디 돌아다니기가 영 번거로워서 점심 겸 이른 저녁 식사 겸 펍에 앉아 한참을 일했다. 오늘도 연또피(연호 또 피시 앤 칩스)와 연또기(연호 또 기네스).


웬만하면 저녁에는 잘 안 돌아다니려 하지만, 깜깜한 시간 만의 매력이 또 있다. 심지어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린 안개비로 세상이 촉촉이 젖어 있는 밤이라 더 운치 있다. 전형적인 영국의 겨울을 겪을 수 있어 감사하는 마음.


좋은 건 질릴 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란 사람... 지금 이 시간이 지나가면 언제 또 물랑루즈 뮤지컬을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할 수 있을 때 하자.


사틴의 다른 캐스팅을 보고 싶었기에, 첫 번째 공연에서 본 사틴 배우(Tanisha Spring)가 쉬는 날이라는 오늘을 부러 골랐다. 아니 그런데 바뀌라는 사틴은 안 바뀌고 마음에 쏙 들었던 크리스티안(Dom Simpson)만 다른 배우(Gavin Ryan)인 게 아닌가! 사실 크리스티안을 기대하고 다른 사틴과의 합이 궁금했던 건데 그 바람이 스러지니 전지적 시점에서 공연을 보게 된다. 오늘의 크리스티안은 훨씬 담백하다. 감정이 최고조로 올라오는 순간도 폭발보다는 속에서 삭이고 내지르는 느낌이다. 같은 역할의 다른 연기를 보는 매력을 이제야 어렴풋하게나마 알겠다. 한국에서 본 공연은 전부 홍광호 크리스티안 & 아이비 사틴의 조합으로 이 둘 외에 다른 배우의 연기를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생경하게 다가온다. 인터미션 타이밍이 아닌데 별안간 공연이 멈춰서 이게 뭔 일인가 했는데 Medical Emergency가 생겨서 잠깐 쉬어 간단다. 숱한 공연 경력에도 이런 일은 또 처음이라 너무 놀랐다.


철저하게 혼자로서 있는 순간은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을 경험하게 한다. 일상에 무게를 두는 가치에 대해 알아간다. 반복과 체험에 방점을 찍는 나를 이제사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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