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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22. 2024

언젠가 사무치게 그리워질 오늘

런던 17일 차 - 2024년 1월 24일

아침에 일어나면 밤사이 꽁꽁 닫아둔 암막 커튼을 빼꼼 걷어낸다. 영국의 겨울은 일출 시간이 8시나 돼야 해서 커튼을 걷어도 깜깜한 건 매한가지.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일기를 쓰다 보면 해가 뜬다. 동남향 창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양을 보고 오늘의 날씨를 가늠한다. 오늘은 비교적 화창한 날씨다. 요즘 런던은 10~14도를 웃돌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쌀쌀한 편. 엄청 좋다! 고 감탄할 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 흐림이면 좋은 축에 속한다. 좋음의 기준이야말로 상대적이다.


로망에 살고 로망에 죽는 나는야 로망 인간.. 템즈 강변에서 빅벤을 바라보며 뛴다는 로망을 충실히 실현하려 오늘은 엊그제와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강풍이 거세서 바람을 가르며 가야 하는 구간에는 경보를 하기도 했는데 페이스가 6분대로 올라온 걸 보니 러닝 근육을 착실히 회복하는 중이다. 빅벤을 바라보며 달리는 게 엄청 감탄스러워서 첫 시네마틱 영상을 찍었지만 부끄러워서 인스타 스토리엔 올리지 못했음 ㅎㅎㅎ 좋은 곳을 가거나 특별한 음식을 먹지도 않고 매일 비슷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서(오전 러닝, 오후 펍, 저녁 숙소 혹은 공연) SNS에 공유하지 않는 혼자만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열심히 달리고 돌아오는 길엔 생수를 사러 동네 Sainsbury's로. 희한하게 서울에의 일상에선 자주 손이 가지 않는 과일이 당긴다. 특히 블루베리/라즈베리/블랙베리 3종을 야무지게 챙겨 먹고 있다. 낮에 마트에 왔더니 초밥 코너에 저녁에는 보이지 않던 미역줄기 무침과 에다마메가 있길래 미역줄기 '샐러드'를 한 번 사 봤다. 과자 코너가 아닌 인터내셔널 코너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초코송이와 빼빼로를 보니 괜히 반가워서. 굳세어라 너희들!


다시 히드로 공항으로 돌아갈 때에는 패딩턴 역에서 히드로 익스프레스 열차를 타야 한다. 히드로 익스프레스는 히드로 공항-패딩턴 역을 15분 만에 주파할 수 있는 멋진 열차다. 단순히 패딩턴 곰인형을 갖고 싶어서 패딩턴 역으로 향했는데, 돌아가는 날도 짐을 들고 같은 방법으로 패딩턴 역으로 와야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리허설을 하게 됐다. 다만 히드로 익스프레스는 공항 3&5 터미널과 패딩턴 역을 오가고, 대한항공은 4 터미널에서 출/도착을 하기 때문에 터미널 이동이 조금 번거롭다. 처음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고 우왕좌왕하다 히드로 익스프레스 왕복 티켓을 끊었는데(구매 후 30일 이내 어느 날이든 사용 가능) 오히려 패딩턴 역까지 가는 게 더 번거로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편도로 구매했을 것.. 이것도 ‘혹시나’ 병의 결과다. 겪어보지도 않고 혹시나 아쉬울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 대비해 두는 일.


패딩턴 역은 킹스크로스 역만큼 꽤 큰 기차역이라 사람이 엄청 많다. 혼란한 패딩턴 역을 뒤로하고 저녁에 볼 공연장이 있는 워털루 역으로 넘어왔다. 워털루 역은 이렇게 멋지게 생겼다구요. 이 동네엔 런던아이가 있는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런던아이를 탈 생각 따윈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맥도날드 쿼터파운더치즈버거가 언제나 원픽인 나. 한국에선 먹기 힘든 파이브가이즈 햄버거를 영국에서 먹어본다. 여기서도 리틀 치즈 버거만 주문했더니 토핑 진짜 추가 안 할 거냐고 직원이 두 번이나 물어봐서 구운 버섯까지 넣었다. 파이브가이즈 먹으려면 오픈런 혹은 웨이팅이 몇 시간씩 된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나? 그냥 햄버거 맛이던데... 미각에 둔감한 사람은 오히려 온갖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탄산음료 기계에 훨씬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코카/펩시/환타/마운틴듀 등등.. 은 물론이고, 코카콜라를 클릭하면 코크 오리지널/제로/제로 카페인 프리 -> 제로 카페인 프리 안에서도 오리지널/라임/오렌지/바닐라/체리/체리바닐라/라즈베리 까지.. 무궁무진하게 취향 가지를 뻗어나가는 다양성에 박수를.


둘러보다 서머셋 하우스가 근처에 있어 산책 겸 들러보았다. <러브 액추얼리>에서 스케이트 타던 신이 바로 요기에서 찍은 것. 12월이 되면 아이스링크가 생긴다고 한다. 서울시청 앞 광장 아이스링크 같은 느낌일까? 유럽의 연말은 너무 북적일 것 같아 일부러 피했는데, 이쯤 되니 12월에 와 보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네.



다시 다리 건너서 템즈강 남쪽 - 워털루역 - 을 향해 내려가는데 마침 일몰이 막 지났다. 그래봐야 오후 네시 반 남짓. 구름이 가득한데 어쩜 이렇게 예쁘지? 나 런던하고 사랑에 빠졌나 봐... 빅벤에 조명이 들어오니 피터팬이랑 웬디와 그 동생들이 함께 날아다니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저녁 7시 30분 공연까지 시간이 꽤 남아서 근처 바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자신 있게 맥주를 주문하니 어김없이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래놓고 내 나이를 보곤 모두가 화들짝 놀라곤 하지. 그럼 나는 물어봐 줘서 고맙다고 한다(은근 좋음). 이들은 특히나 아시안의 액면가에 잘 속아서 마트에서 술을 살 때나, 펍에 갈 때나 꼭 여권을 지참하는 게 좋다. 오후 5시가 되면 퇴근한 직장인들이 한잔 하려고 펍이나 바(bar)로 몰려들어 빈자리가 없을 수 있으니 테이블을 잡으려면 5시 이전~7시 반 이후에 가는 건 새로이 터득한 꿀팁! 이들은 펍에서 저녁식사를 하지 않고, 오로지 맥주나 와인만 시켜 한두 잔 마시고 헤어지는 게 일상이라 어쩌다 내가 저녁식사를 주문하는 날이면 굉장히 특이하게 본다.


오늘은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런던 필하모닉과 이논 바르너턴의 공연을 본다. 너무 유명해 전부 꿰고 있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지만 실황을 듣는 건 처음이다.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은 전혀 경험할 기회가 없던 곡이라 이도 처음인 건 매한가지. 사실 오케스트라 비수기인 1월에 오케 공연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 프로그램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아묻따 예매했었다. 더구나 1열 중앙을 골랐는데도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내 자리 찾아 공연장에 들어가고 나서야 놀라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더라.. 심지어 피아노 바로 앞이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1열에서 보니, 피아니스트의 힘 있는 연주를 오롯이 흡수할 수 있는 건 흠잡을 데 없으나 이 협주곡의 엣지를 담당하는 관악기 연주자들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은 초면인데도 듣는 내내 제목처럼 '환상'이라는 감상이 들었으니, 아아 나는 정말 낭만주의 음악을 좋아하나 봐.


사진에 전부 담기지 않아 아쉬운데.. 공연장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주로 가다가 롯데콘서트홀을 처음 가보고선 확실히 크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여기는 최소 롯데콘서트홀의 1.5~2배는 되는 것 같다. 황홀한 공간에 앉아 유한한 시간을 있는 힘껏 느껴본다. 언젠간 또 올 수 있겠지. 분명 다음이 또 있을 테니 더는 아쉬워하지 말자구.


공연장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홍콩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서 교수로 계시다 이제는 은퇴하신 영국 할아버지와 수다 떨며 보내는 지금의 시간이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 나누고, 점원에게 서슴없이 안부를 물으며, 영국 와서 가장 많이 듣고 내뱉은 말이 Sorry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배려가 있는 문화 속에 놓인 일상의 온기가 필요한 날에는 오늘을 떠올리기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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