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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24. 2024

보고 또 봐도 애틋한 마음

런던 18일 차 - 2024년 1월 25일

매일이 너무나도 똑같아서 이젠 일기를 쓰는 것이 민망할 정도이지만. 오늘의 기록은 결국 어느 날의 나를 위한 일이니까, 개의치 않다고 외쳐본다. 사실 지난주까지만 하더라도 런던 웬만큼 봤다.. 일정을 너무 길게 잡았나.. 머쓱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생활을 계획하고 온 것이기에 지금의 모습이 예상한 대로가 맞다. 막상 떠날 때가 다가오니 더욱 애틋하고, 런던에 있는데도 런던이 그리운 건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일 테지.


아침엔 커피와 함께 먹는 블루베리가 최고야. 블루베리마저 그리워지는 날이 올까.


오랜만에 Southwark로 향한다. 또박또박 읽으면 '사우스워크'인데 영국 사람들은 '서더크'라고 말하는 신기한 곳. 공기가 아주 차던 날 마음마저 냉하고 심란한 상태로 향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차분히 걸었다.


다시 와도 또 좋다. 언제 어느 시간에 와도 평온한 테이트 모던. 언제 어느 시간에 와도 밀도가 낮아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오늘은 특별히 버스킹 하는 할아버지도 있다. Take me home, country road이 테이트 모던과 은근 잘 어울리더라.


에어비앤비 사기로 촉발된, 평정이 도미노처럼 하나 둘 무너져 내리던 날에 여기에 서서 선덕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었지. 혹여나 힘든 장소로 기억될까 싶어 예쁜 마음으로 덮고자 다시 같은 자리에 섰다. 이제는 모두 해결됐고 아무런 응어리가 없는 오늘임에도 압도적인 층고와 규모의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괜히 위로받는다. 자신에게 공간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걸 느꼈다. 정돈되지 않은 누군가의 생활 흔적을 견디지 못하고 에어비앤비를 뛰쳐나온 것도, 유년 시절 <러브 하우스>를 챙겨보던 것도, 미술보다 건축에 더 큰 영감을 받는 것도, 인테리어 영상을 보고 또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간에 상처받은 마음을 공간으로 치유받은 나만의 장소다.


적절한 숙소 찾기에 실패했다는 패배감을 달래러 왔던 피시 앤 칩스 맛집. 최근 동네에서 시도한 피시 앤 칩스들이 영 이만하지 못해서 근처 온 김에 한 번 더 찾았다. 어떤 코리안 유튜버가 여기가 런던 최고의 피시 앤 칩스 맛집이라던데? 하며 스몰 톡을 건네니 오! 칭찬 고마워, 우리 가게 잘하는 거 맞는데 베스트는 아니야. 내가 생각하는 베스트는 저~기야. 하고 솔직하게 로컬 픽 맛집을 알려 준다. 이번 휴가의 테마는 피시 앤 칩스가 되어버린 만큼 찐 맛집도 꼭 가보겠어!


매일매일 보면 안 재밌어질까? 지난주, 그제에 이어 세 번째인데도 왜 계속 좋은 건데..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볼 생각은 왜 하고 있는 건데... 오늘도 꼭 다시 보고 싶던 크리스티안을 못 만났다. 대신 궁금하던 대로 사틴이 그제와 달랐다! 캐스트 리스트에도 업데이트가 안 되어있는 배우라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 이전 두 번의 사틴과는 다르게 내지르는 성량이 아주 풍부했다. 대신 애드리브가 많은 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법한 부분(나는 불호). 그제와 오늘의 크리스티안이 아쉽다고 생각한 지점을 확실히 알았다. 2막 시작하고 "Because she doesn't love YOU!!" 하고 질투에 멀어 무의식의 흐름대로 내지르는 대사와 록산느 넘버에 찐득한 감정이 없어서 그랬다. 음악 큐가 묘하게 어긋나는 게 사틴 배우가 바뀌어서 그렇다 생각했는데 커튼콜 할 때 보니 음악감독이 다른 분이더라고. 관객 호응이나 매너도 오늘이 훨씬 준수해서 더욱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보게 되더라. 여러 번 보면 볼수록 연기와 음악과 공간 연출이 더 많이 들어오는 건 현장 공연만의 재미다. 어쩌면 녹화된 예술로 관객과 직접 호흡이 어려운 업계에서 부족한 마음을 채우고 싶은 걸 지도 모르겠다.


분명 즐거운 씬인데도, 갑자기 파도처럼 몰려들어오는 행복감에 압도되어 눈물이 차오르던 오늘. 자기만족으로 온 여행에서 만족을 농축해 기억에 꽉꽉 눌러 담고 있는 오늘. 찬란하게 기억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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