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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28. 2024

마음을 전해요

런던 19일 차 - 2024년 1월 26일

호텔이 매우 건조하고 카펫 바닥 덕택에 먼지가 많다 보니 콧물 기침을 얻었다. 요 며칠 마른기침이 나길래 따뜻한 차로 기관지를 잘 달래었는데, 이제는 엄청난 가래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기침 소리가 살벌한 것치곤 콧물 기침 외에 별다른 증상이 없어 다행이다. 자기 전에 꼭 수건 흠뻑 적셔 걸어두어야겠다.


오늘 아침은 라즈베리로 시작. 베리류 과일을 특히나 좋아한다는 건 영국 와서 새롭게 안 사실.


밤새워 조용히 해 둔 휴대폰을 여니 반가운 연락이 와 있다. 카드에 진심인 영국인들답게 어딜 가나 예쁜 카드들이 많길래 몇 개 집어 들어 지난주, 친구에게 편지를 부쳤다. EMS가 아닌 국제우편은 오래 걸린다고 하기에 내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편지가 먼저 당도할 수 있을지 긴장되고 설레는 기분으로 보내었는데. 두근거리는 마음까지 함께 전달된 것 같아 행복하다!


떠오르는 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늘은 환상적인 날씨임에 틀림없다.


평소보다 서둘러 채비를 해 빅 벤으로 향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량하다. 바삐 움직인 덕에 정오 종소리를 듣는 행운까지 얻었다. 영국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큼 맑은 하늘이라는 걸 알기에 친구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선물 같은 날이라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림 같은 풍경 보면서 황홀한 이 기분을 함께 누리자고. 한국은 늦은 시간임에도 흔쾌히 전화받아준 착한 내 친구들... 덕분에 내가 더 행복했어!


딱히 용건이 없는데도 한참 동안이나 이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아름다운 오늘이 흐뭇해서, 내게 이 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라서, 다시는 없을 것 같아서, 눈으로 가슴으로 머릿속에 새기기 바빴다. 지금 여기에 서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속에는 다음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이 행복을 깨고 싶지 않다는 아쉬움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놓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야 한다고 종종대는 절박함을 낳았다. 다음에 다시 오자, 다음에 또 오면 된다 하는 위로가 어렵다.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순간에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아이는, 바라던 걸 우연히 마주하면 애쓰는 게 익숙하다. 먹을 게 귀했던 시절, 허기지지 않아도 음식을 있는 힘껏 먹고 비축해 두던 것처럼.


쉬이 종종거리는 내게도 다음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한 휴가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다시 런던에 와 있지 않냐고, 이다음도, 그다음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어제 펍에서 말 품을 판 덕에 알게 된, 현지인 사장님이 일러준 버로우 마켓 안 피시 앤 칩스 찐 맛집으로 왔다. 매우 기대하며 일부러 많이 걷고 허기진 상태로 방문했는데 레스토랑이 아니라 노점이라 잠시 멈칫했지만... 무려 피시 앤 칩스 어워즈에서 상을 받은 맛집이라 하니 자신 있게 줄을 섰다. 그렇지만 타르타르소스를 돈 받고 팔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니요!


음식을 받고 보니 바로 옆에 같은 가게의 레스토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절망했지만 어쩔 수 없지. 노점 옆에 놓인 간이 테이블에 자리했다. 식사하시는 할아버지들 사이에 혼자 끼여서 한자리 차지한 나 어떤데... 이 상황이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속으로 한참 웃었다 ㅎㅎㅎ 과연 피시 앤 칩스 어워즈 우승을 한 이 식당의 피시 앤 칩스 맛은! 튀김옷 모양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어제 갔던 펍이 열 배는 더 맛있었다. 영국인과 한국인은 각자가 생각하는 튀김의 정의가 다른가 싶을 정도.


가봐야지 하고 계속 미루던 헤롯(Harrods) 백화점도 들렀다. 지하 1층(LG 층)에는 한 층의 반이 전부 백화점 굿즈 매장인데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일 좋아하는 웨스티 화이트 테리어 인형이 있어서 기절할 뻔. 결국 작은 키 링을 샀다. 로열 컬렉션 티 세트가 탐났지만 가격을 알자마자 눈으로만 보기.


옆으로는 서점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서성였다. 일정 비율 이상의 책들은 헤롯 백화점 전용 에디션으로 발매되는 것 같아 보였다. 마치 전시장처럼 일관되나 미감을 해치지 않는 표지로 디자인된 책들이 대부분. 그 와중에 필름 코리아를 발견하고 반가워서 냅다 사진 찍어버리기.


목적 없이 백화점을 유유히 표류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어떤 등급 따위로 정의하는 걸 알아챈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과 비언어로 점철된 상대의 반응으로 읽은 맥락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


돌아와서 저녁식사는 호기심에 사 본 연어 포케가 당첨됐다. 대단한 맛을 바라던 건 아니었는데 정말 액면가 그대로였음 ㅎㅎ 그래도 좋아하는 연어와 에다마메가 있으니 되었다.


영국 넷플릭스에는 프렌즈, 빅뱅이론, 가십걸, 슈츠, 심지어 다운튼 애비까지 내가 사랑하는 드라마들이 전부 다 있다. 요즘 한국 넷플릭스에 볼 게 없어서 서운했던 참인데 여기서 보게 되다니 감개무량하구먼 그려. 영국에 왔으니 프렌즈 영국 에피소드 다시 봐줘야 인지상정 아니겠소? 그나저나 프렌즈 시즌 4가 방송하던 때는 무려 98년이었는데 중간중간 나오는 빅벤 인서트는 소름 돋을 만큼 지금과 닮아 있다.


이제 돌아갈 날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남았다. 주어진 하루를 있는 힘껏 사랑해 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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