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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31. 2024

다정한 시선

런던 20일 차 - 2024년 1월 27일

잘 자고 일어나 활기찬 오전을 시작하면서, 고국보다 아홉 시간이나 뒤진 곳에 있어 서울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식사 시간임을 자각하면 특별히 내게만 여분의 시간이 주어진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세계 시간의 기준점에 있기에 고국은 나보다 아홉 시간 빠르다고 해야겠지만. 쏟아지는 서울의 뉴스를 보고 있자니 헤르미온느의 타임 터너를 아무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듯한 은밀한 기분이 퍽 흐뭇하다.


오늘 블랙베리는 유독 달고 새콤하고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이번 휴가의 마지막이자 영국에서 세 번째, 런던에서 두 번째로 맞는 주말. 어쩌면 당분간 가장 그리워질 곳으로 향한다. 계절을 실감하지 못할 만큼 푹한 온도와 구름옷을 입은 햇님이 걸려 있는 오후는 야외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날이다. 오늘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리젠트 파크에는 온 동네 아가들과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로 수선스럽다. 드디어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산책하는 웨스티 화이트 테리어도 마주쳤다. 공원을 차분히 걸으며, 러닝을 할 땐 어쩌면 놓쳤을 풍경들을 가슴에 담았다. 리젠트 파크의 주말 풍경이 나의 일상이 된 미래를 조심스럽게 상상하면서 다정한 시선을 건네었다.


찐하게 런던을 함께하고 보내줄 요량으로 데리고 온 운동화는 예상보다 조금 이른 시점에 뽕 뚫어졌다. 지난주 어느 날인가 작은 구멍이 보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어느새 사이로 양말이 비칠 만큼 이렇게 커져 있구나. 지하철에 고개 숙인 사람들은 모두가 내 신발 구멍만 쳐다보는 것 같고 스스로 괜스레 작아지곤 했는데 막상 헤어질 날이 다가오니 애틋한 마음이 앞선다. 나와 많은 곳을 누벼주어 고마워. 그중 제일 찐하게 행복했던 런던에 널 두고 갈 테니 꼭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불러주렴.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꽤 많이 마주치는 Farmer J. 그냥 프랜차이즈 식당처럼 보이는데 평일 낮에는 어느 지점이든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긴 줄이 나있는 걸 보며 늦은 오후나 주말에 꼭 한 번 가보아야겠다 싶었다. 무려 'GOCHUJANG' 살몬을 지나칠 수 없는 코리안은 제일 비싼 고추장 살몬을 골랐고요... 이름만 고추장이 아니라 은근 매콤하기까지. 사진으론 그냥 채소인듯해도 보기보다 꽤 맛있다. 원하는 대로 건강한 '맛있는' 식사가 가능한 레스토랑이라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듯. 의외로 영국엔 '건강'과 '맛있는'이 공존하는 중저가의 식당이 잘 없다.


어딜 가든 아가 옷만 보면 우리 조카딸래미들 생각에 쉽게 못 지나치는 이모 여기 있슈. 아가 옷 중에서도 원지에 발 달린 건 무조건 멈춰 서게 되는 나의 취향. AWWWWWW.


런던 지하철 광고는 이렇게 선로 바깥으로 크게 걸려 있다. 사랑해 마지않는 <노멀 피플>의 폴 메스컬이 주연을 맡았다고 해서 궁금했던 영화인데 마침 엊그제 개봉했으니 보러 갈까 하는 반가운 마음에.


오늘 저녁은 위그모어 홀에서 모차르트 생일 기념 콘서트! 작년 두 번이나 갔던 손열음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공연에 이어 또 듣게 되다니. 특히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는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작년에 11~14번 / 15~18번의 실황을 본 데 이어 오늘의 프로그램은 7, 11, 15, 18번이다. 제일 좋아하는 11번을 한 번 더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아담하고 클래식한 장소에서 이보다 더 클래식할 수 없는 프로그램까지 함께하는 순간은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흐뭇하다. 특히나 옆에 앉은 할아버지와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손녀가 그랬다. 손녀의 키높이 방석을 손수 챙겨주고, 나들이 간식으로 싸 온 주전부리를 함께 까먹으며,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해 본 적 있다고 자랑하는 손녀를 사랑으로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다정한 눈빛. 공연 내내 자리에서 자신의 무릎에 피아노를 치는 아이가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1악장 알레그로가~ 2악장 안단테가~하며 재잘거리는 손녀의 이야기에 자신의 감상을 덧붙이는 자상한 할아버지를 가진 아이가 부러워 혼났다.


뒤이어 피아노에 대해서는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좋아하던 어릴 적 내겐 다정한 관심이 자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울컥한다. 피아노가 할머니댁에만 있어 일요일은 피아노 치는 날이었던 내게, 피아노 소리가 주말 늦잠을 깨웠다는 연유로 역정을 내며 엄마랑 싸우던 작은 고모의 모습이 떠올라 이내 시무룩해진다.


아이야, 너는 네가 얼마나 예쁜 할아버지를 가졌는지 과연 알고 있니. 누군가 네 이야기에 따뜻한 관심을 부어주는 일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고 있니. 자라면서 이 순간이 네 사랑을 키워나가는 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건 어린 시절 다정한 양분이 필요했던 오지랖 넓은 어른의 바람이다.


오늘의 공연은 위그모어 홀 유튜브 계정에서 라이브 스트리밍까지 더해진 멋진 날이다. 오늘이 그리울 때마다 녹화본을 보며 황홀함을 되새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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