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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Jun 08. 2024

적응과 떠남 사이

런던 21일 차 - 2024년 1월 28일

밤사이 감기가 심해졌는지 컨디션이 영 꽝이구먼. 오늘은 영국에서의 마지막 일요일.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힘이 세서 자연스레 아주 많은 노력이 들어가게 한다. 뭘 해야 아쉬움이 없을까 고민하다 '런던의 마지막'이라는 수식어를 철회하고 '이번 휴가의 마지막' 따위로 대체하기로 했다. 곧 또 올 거니까 끝일 순 없지. 사실 영국의 일요일은 토요일보다도 훨씬 심심한 날이다. 공연장도 쉬는 날, 백화점도, 마트도, 펍도 모두 단축 영업으로 오후 5~6시면 문을 닫는다.


제가 매일 똑같은 곳만 가는 것처럼 보이시나요? 네.. 맞습니다.. 런던-빅벤=0 이거든요. 하늘이 맑으면 무조건 와야 하거든요. 어쩌면 당분간 가장 그리울 곳을 꼽으라면 지금 이 장소와 리젠트 파크일 테니. 어쩜 영국 와서 흐린 날이 세 손가락 안에 꼽았던 건 내가 날씨 요정인 덕택인가 호호


유독 여기만 경비가 삼엄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철창 안을 보고 있어서, 매번 지나갈 때마다 뭐 재미난 거 있길래 그러나.. 했는데 다우닝 가였다! 어쩐지 요 앞 길 건너 시위대도 많고 경찰도 자주 돌아다니더라니. 궁금증 해결~


주말은 영국인들에게도 펍 데이라서 동네 후미진 펍을 가도 북적인다. 손님으로 꽉 차있는 펍에 들어가면 시선을 한몸에 받기 일쑤라(혼자/아시안/여자, 주목을 끄는 3박자를 모두 갖췄음) 한산한 곳을 찾다가 트래펄가 광장 앞 아주 큰 펍이 조금 덜 붐비기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여행객으로서 받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땐 되려 유명 관광지 앞 펍이 마음 편하다는 아이러니를 마지막이 되어서야 깨달았네. 오늘은 일찍 닫는 날이라 기네스가 없다는 말에 처음 도전해 본 라거 맥주. 이제 안주 없이 맥주만 마시는 게 자연스러워진 걸 보니 영국 사람 다 됐슈.


트래펄가 광장 안녕. 국립 박물관도 안녕. 금방 또 만나!


휴가를 떠나오면서 1월에 개봉하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는데, 여기서 보면 되지 뭐가 대수랴!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거 말고 왠지 여기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작품 위주로 찬찬히 골라 본다. 어제 튜브 플랫폼에서 광고를 봤던 영화 <All of us Strangers>를 선택했다. <플리 백>의 신부님과 <노멀 피플>의 코넬, <더 크라운>의 엘리자베스라면 무조건 봐야 하지 않겠어요? 야마다 다이치의 소설 <이인들과의 여름 ; 영제 Strangers>을 원작으로 각색한 영국 영화다. 퀴어 사랑 영화라는 장르는 둘째 치고 30년 전 돌아가신 부모님과 담백한 재회를 하는 씬만으로 가치 있다. 자고 있는 엄마 아빠 사이를 어린 시절처럼 파고들어 엄마와 침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엄청난 눈물 버튼이었다. 팝콘 먹으면서 흥미롭게 보다가 별안간 너무 울어서 엉덩이에 뿔났을 수도.. 한국에서도 개봉하면 좋겠다. (24년 6월 8일 현재 디즈니+에서 스트리밍 가능)


영화가 끝나니 한참 어두워진 시간. 이번 방문에서 의외로 한 번도 못 본 야경도 챙겨줘야 인지상정이지. 다리 위에서 쌀쌀한 강바람 맞으며 몽글한 기분을 한껏 누리고 있는 와중에 별안간 귀에 꽂히는 모국어 대화에 쫑긋한다. 봐봐~ 여의도잖아!!! 솔직히 빅벤만 없었으면 그냥 여의도랑 똑같애~ 어머 그러고 보니 야경은 어쩜 여의도가 더 예쁜 것 같기도 하네.


적응할 만하면 서울로 돌아가게 되겠다고 넘겨짚은 그대로다. 비로소 이 도시가 체화되었구나 느낀 오늘은 곧 떠날 일만을 남기고 있다. 동화된 일상이 이제 막 재밌어지려 하던 참인데. 아쉬움의 탄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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