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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Jun 09. 2024

인연은 자연스럽다

런던 22일 차 - 2024년 1월 29일

별안간 새벽 세 시부터 깨어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너무 아쉬워서 하루를 길게 쓰고 싶은 속내를 몸도 알아챘나. 마음과는 다르게 시간은 속절없이 잘 간다. 조금은 천천히 속도를 늦춰도 좋을 텐데.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건 이 장소가 애틋해서일까, 부담 없는 일상이 맘에 들어서일까? 영국에서의 반년 남짓을 그리워할 때마다, 서울에서도 6개월을 의무에서 벗어나 그렇게 큰돈 쓰면서 유유자적 있으면 영국에서랑 똑같이 행복할걸? 하고 응수하던 누군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 떠남을 주저하게 했다. 잔뜩 쪼그라든 지갑의 눈치를 보게 했다. 그러나 생각의 속박에서 벗어나 안전지대를 나와 보니 어렴풋이 알겠다. 나는 런던을 사랑한다는 것을. 서울보다 훨씬 궁핍하게 있더라도 그냥, 여기가 좋다는 것을.


마지막 아침 블루베리가 되려나. 새로운 취향을 알게 해 주어 고마웠다!


집었다 들었다, 오래도록 고민하던 에코백을 사러 마지막으로 리버티 백화점도 한 번 더 들러 주고.


손바닥만 한 천이 2만 5천 원 영국에선 £19

애플 뮤직 클래식 론칭 기념으로 명동 애플스토어에서 임윤찬이 쇼팽 에튀드를 연주했다길래 괜히 애플스토어가 가고 싶더라니(임윤찬이 애플스토어에서 피아노 친 거랑 내가 애플스토어 가고 싶은 거랑 뭔 상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있나. 이거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 가격인 것 같다 생각했던 물건을 내가 어느덧 홀린 듯 들고 있네...? 여행지에서 지갑이 열리는 속도는 누구보다 빠르다. 근데 이 친구 대단하다. 손이 건조한 걸 참을 수 없는 내가 사계절 필수로 휴대하는 핸드크림이 키보드에 묻어 생긴 맥북 액정의 기름 자국을 멀끔하게 지워 준다. 이런 퀄리티라면 얼마라도 용서할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또 GOCHUJANG SALMON

평일 점심은 11시 반부터 가능한 Farmer J. 지나가다 빈자리가 보여 부리나케 식사도 클린 하게 챙겨 준다. 연어 밑에 깔린 건 Farmer J Grains인데, 밥처럼 찰기 있게 붙어있는 게 아니라 모래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귀리, 꾸스꾸스, 콜리플라워 라이스 이런 애들을 섞어서 향신료와 함께 밥처럼 만든 메뉴인 이게 제일 맘에 들었다. 고두밥과 포슬포슬한 식감을 좋아하는 탓이려나. 조금 변화를 주어 병아리콩을 도전해 보았지만 어제 먹은 미소 가지가 훨씬 맛있었다. 양이 꽤 많아 깨끗이 먹을 수 없는 게 아쉬워 자연스레 다음엔 조금씩 덜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아 참, 나 이제 곧 서울 돌아가야 하지.


디즈니 스토어는 두 번, 세 번 와도 기분 좋은 곳. 특히나 우리 조카 딸내미들 생각에 이모는 한참을 아기 옷 앞에서 서성인다. 아무리 봐도 아가 옷은 공주 향만 나도록 억지로 만든 감이 있으니, 완성도 높은 큰 아이들 옷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걸 입을 수 있으려면 한참 기다려야겠지.. 그때가 되면 딸내미들은 백설 공주보단 엘사를 더 좋아하려나. 때가 되면 어련히 사다 줄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을 거라고 달래며 발걸음을 돌렸다.


한낮의 파가니니 바이올린&기타 소나타는 쏘 황홀 그 자체

위그모어 홀에서는 종종 13시 공연이 있다. 오늘은 월요일임에도 13시 공연으로 시작한다. 오늘의 공연은 BBC 라디오 3을 통해 영국 전역과 한국에(!!!) 실황 중계가 된다고 한다.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관객의 주요 연령대는 어르신들이다. 영국에 와서 베를리오즈에 이어 파가니니 바이올린 소나타를 듣게 되다니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주 완벽한 구성이다. 클래식 기타와 바이올린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건 또 몰랐네.


평소처럼 공연 전 프로그램을 정독하고 있는데 옆에서 인사를 건네는 누군가. 타국에서 날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기에 그저 인사치레인 줄 알았더니 웬걸, 지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장에서 옆자리에 앉아 수다 떨던 할아버지 교수님을 또 바로 옆자리에서 마주했다. 심지어 지난 공연에는 아내분이 못 오게 되셔서 좋은 자리 티켓을 취소했다고 아쉬워하시더니 이번엔 함께 오시기까지. 기가 막힌 우연에 너무 놀라 이야기를 나누는 나와 할아버지를 어리둥절하며 번갈아 보시던 할머니의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여행 잘하고, 또 볼 수 있기를~ 하며 헤어졌는데 이렇게 금방 다시 마주치다니.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우연이 내게도 일어나다니.


이제 확실히 알겠다. 인연은 자연스럽다. 고통스럽게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피시 앤 칩스에 이은 최애 음식, 스카치 에그

이른 저녁을 먹으러 펍으로 향했다. 흑맥주를 좋아해 기네스 드래프트 캔맥주를 마실 때마다 영국 펍에서 먹던 기네스 생맥주가 그렇게 그리웠더랬지. 이번 휴가 내내 원 없이 기네스 생맥주를 마시면서,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건 기네스가 아니라 기네스로 대표되는 영국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데에 가닿았다. Black Pudding Scotch Egg까지 완벽한 마지막 저녁 식사.


가장 많이 탔던 Victoria 라인

자주 다니는 노선은 머릿속에 외우고 구글맵 없이도 Northbound / Southbound 척척 찾아다니는 이 일상이 분명 그리워지겠지. 낡아 빠진 에스컬레이터도, 너무 좁아 하마터면 앞사람 무릎이 닿을 법한 작은 열차도, 타기만 했다 하면 데이터가 안 터져 듣고 있던 음악까지 일시 정지되는 아날로그스러움도, 그래서 하릴없이 멍 때리며 지하철 노선도를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생경함도, 커브를 지날 때면 귀가 찢어질 정도로 굉음이 들리는 튜브도 모두 그리워지겠지.


물랑루즈 뮤지컬 안 사랑하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진짜 진짜 휴가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물랑루즈 뮤지컬로 마무리하는 찐 팬은 나밖에 없을 거야. 몇 번을 와도 적응이 안 되는 영국의 공연 문화는, 공연 내내 식음료의 섭취가 자유롭다는 것. 특히나 리셉션에서 술을 팔고, 샴페인이 포함된 패키지 티켓이 있다. 인터미션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와인과 샴페인을 한 잔씩 사서 자리로 돌아온다(심지어 유리로 된 와인잔에 와인을 준다!). 덕분에 옆자리에 앉은 귀여운 스패니시 부녀가 팝콘을 두 개나 사서 내게 한 통을 나눠주는 귀여운 일도 있다.


한국과 다른 공연 문화에 의아했던 부분까지 스레드 포스팅 보고 이해 완료

사실 기대하던 캐스트가 있었다. 홈페이지와 공연장에 걸려 있는 캐스트 리스트는 아무것도 맞지 않아.. 아무것도! 단 한 번도 제대로 적혀있던 적이 없으니 믿지 말자. 런던 와서 처음으로 만난 크리스티안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갔던 지난 두 번의 공연이 모두 다른 배우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떠나기 직전까지 뮤지컬 볼 결심을 한 거다. 다행히(?) 주조연 모두 첫 관람 공연과 동일한 캐스트의 연기를 한 번 더 볼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인연이다. 왜 그렇게 그의 크리스티안 연기가 보고 싶었는지 명확한 문장으로 형용할 수는 없으나(어쩌면 내 취향에 꼭 맞는 외모였을지도) 또 보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가면 두고두고 애태울 걸 알아서 하늘이 옜다 하고 만나게 해 준 것 같기도.


내가 이곳에 네가 여기에 있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일. 시간이 흘러 돌아가는 것도 순리에 맞는 일. 흐름에 내맡기면 꼭 다음이 있을 거야. 인연은 힘들이거나 애쓰지 않아도 되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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