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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Jun 15. 2024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런던 23일 차 - 2024년 1월 30일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짐을 정리하면서, 내일 이 시간에는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겠지 싶어 더욱 어수선하다. 드디어 길고 긴 휴가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왔구나. 더운 여름 처음 휴가를 계획하며 항공권을 예약하던 날이 떠오른다. 무작위로 선택한 출국과 귀국일은 아무 의미가 없어 더욱 막연했다. 긴 휴가를 계획했다는 나의 이야기에, 이왕 가는 거 더 오래 다녀오라는 선배의 큰 마음으로 인해 귀국일을 일주일이나 미루면서도 아득하기만 했더랬지. 그러면서도 한 달을 꽉 채우고 돌아오는 날에는 더 이상 여한이 없을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오래 품고 있던 마음의 짐 - 꼭 다시 오겠다는 나와의 약속 - 을 내려놓고 후련한 자신을 기대했다. 그러나 드디어 도래한 당일이 돼서야 바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는 걸 알아챈다.


여러 날을 거치며 소지품을 웬만큼 털어냈음에도 마지막까지 함께한 것들이 한 아름이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해 주어 고마웠어. 애착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보내주며 더 이상 아쉬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놓고 가는 마음의 크기만큼 나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와 줄 힘이 강력해질 거라 믿어 본다.


여행을 떠나왔다는 걸 가장 실감하는 순간은 의외로 잠자리에 누울 때다. 침대와 베개의 생경한 감촉은 그때마다 내가 이곳에 새로이 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곤 했다. 그 감촉이 익숙함으로 변모할 만큼 오래도록 내 방으로 함께한 511호 안녕. 어쩌다 보니 묵게 된 환상적인 위치의 호텔도 안녕. 덕분에 런던의 심장이 내 집 앞마당인 양 매일 걸어서 빅벤 보러 가고, 시내 놀러 나갔다가도 산책 삼아 걸어 돌아오고 그랬다오.


짐 무게 줄인다고 가능한 껴입는 건 모두가 다 하는 일이잖아요 그쵸. 미리 한국으로 택배도 보내고 꼭 필요한 것들만 데려간다고 정리했음에도 체크인할 때 보니 캐리어 무게 22kg 나온 사람 나야 나..


오후 6시 50분 출발 비행기라, 낮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을 많이 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긴 뒤에 더 구석구석 돌아보다 올까, 천천히 여유 있게 공항으로 갈까. 그 끝에는 느지막이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에 일찍 도착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공항으로 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쉬이 마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최대한 미루고 미뤘다. 이제는 진짜 결정해야 하는 갈림길의 마지막인 Earl's Court 역이다. 영국에 입국하며, 돌아갈 날을 위해 사 둔 히드로 익스프레스 티켓이 있으니 여기서 패딩턴 역으로 가면 15분 만에 공항에 당도할 수 있음에도 한 시간이나 걸리는 피카딜리 라인을 타기로 했다.


4 터미널로 가는 열차가 자주 있는 게 아니라 앞선 열차 세 대를 보내야 함에도, 한 시간이나 더 걸리는 여정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수고를 감수하고 어쩌면 가장 오래되고 낡은 피카딜리 라인 열차를 타는 것은,


여행의 첫 시작 숙소가 위치한 South Kensington,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던 설레는 길은 king’s Cross St. Pancras, 여행 전 설렘과 도착 후 상처를 준 에어비앤비는 Caledonian Road, 많은 고뇌를 안겨준 북쪽 끝 Bounds Green, 매일 지나치다 못해 길을 빤히 외워버린 Piccadilly Circus와 Green Park까지, 모든 추억이 여기에 있기 때문일 테지.


런던 집이 되어준 Victoria 역, 버킹엄 궁전이 있는 Green Park 역, 위그모어 홀과 피카딜리 극장 때문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Oxford Circus, 십 년 전 추억과 빅벤을 보며 템즈강변을 달릴 수 있는 Vauxhall까지, 종점 역과 노선표마저 외우고 있는 빅토리아 라인도 잊지 않아야지.


날씨 요정이 떠나는 날이라 그런가. 어두운 내 마음이 투영되어 그런가. 오늘은 전에 없이 잔뜩 흐린 날씨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넓고 낮은 구름이 두껍고 빽빽이 깔린 하늘마저 그리워지겠지. 그럼에도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아 번거롭지 않을 수 있어 감사한 오늘의 날씨. 물 한 병도, 낡은 지하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꼭 기록으로 남겨 본다.


아아. 가장 오고 싶지 않았던 곳에 오게 되다니.


체크인 게이트가 열리기도 전에, 이렇게 일찍 도착해 버리다니. 가장 오래 런던에 있고 싶으면서 제일 먼저 공항에 와버리는 건,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다.


공항이 매우 붐비고 정신이 없다 해서 혹시나 하고 겸사겸사 일찍 왔지만 한산하고 수월한 체크인 탓에 빨리 들어가게 됐다.


점심을 먹기도 안 먹기도 애매한 출발 시간이라 끼니를 거르게 돼서, 이왕 이렇게 된 거 공항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가기로 한다. 펍의 나라답게 출국장 안에도 펍이 있다! 여기서도 숨길 수 없는 나의 지독한 면모.. 기네스 생맥주와 피시 앤 칩스로 이번 휴가를 마무리한다.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할 시간.


기내식에 별 감흥 없는 사람임에도 비빔밥을 처음 받아 봐서 감격한 나

헤어짐이 어려운 마음에는 아쉬움이 있다. 좋은 걸 질릴 때까지 반복하는 행동의 심연에는 섭섭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다. 한 톨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자 오래 보고, 많이 보고, 자주 돌아다녔음에도 내면에 가득 들어찬 서운함은 떠나는 날까지 속상하게 한다. 그러나 아쉬워야 다시 올 수 있다. 남겨놓고 가는 손때 묻은 짐들이 이끌기보다는, 한껏 커져버린 못다 한 애틋함이 나를 다시 또 런던으로 데려다줄 것을 알게 되니 이내 아쉬움에게 고마워졌다.


런던 안녕. 영국 안녕.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닐 테니,

금방 또 올게.


나의 사랑하는 런던 여행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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