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보고
내가 지닌 핵심 감정들을 영화 <인사이드 아웃>처럼 의인화한다면 '질투'가 꼭 자리할 거 같다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루던 날이 있었다. 누군가를 시샘하는 건 필연적으로 죄책감을 동반했기에 그런 감정이 드는 자신마저 원망하곤 했다. 욕심이 많은 아이가 샘도 많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려나. 질투. 시샘하는 마음에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감정 또는 일. 나의 질투에서 깎여내려가는 건 주로 자신이었다. 사춘기 라일리의 자아를 '나는 부족해'로 만든 건 불안이었지만 나의 자아를 '너는 왜 못해. 훨씬 더 잘해야지'로 이끈 건 질투다. 거기서 비롯된 성취욕은 용수철이 되어 스스로를 튀어 오르게 한다. 그렇게 성장 과정 중 많은 날의 좌절에서 나를 일으킨 건 욕심과 질투였다.
돌이켜 보면 양육과 교육에서 부모님은 나를 평범함의 위치에 놓아두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신 듯 싶은데, 부모를 제외한 주변인으로부터 영특하다는 칭찬을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을 특별한 위치에 둔다. 영어를 배우고 싶다며 별안간 아파트 1층 현관에 붙은 튼튼 영어 전단지를 뜯어와 영어 교육엔 태평한 엄마에게 쥐여 주고, 책으로 출판된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을 사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졸라 허락을 받아내던 날, 서점에 가서 마음을 바꿔 조승연 작가의 <공부 기술>이라는 책을 대신 집는다든지, 학업을 보충하러 가게 된 학원이 특목고 입시를 위한 곳이란 걸 알고서는 그 순간 모든 지향이 특목고로 향하던 건 스스로를 특별하다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나온 세월은 나의 평범함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특출나게 공부를 잘하지 않았고, 뛰어난 예체능적 소질을 타고나지 않았으며, 빼어난 미모를 가지거나 남다른 재력을 물려받지 않았다는 걸 직면하며 많이 아팠다. 그러나 평범함을 인정하자 나는 모든 변의 길이가 비등한 육각형이라는 걸 알았다. 한 꼭짓점이 얇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육각형을 바라며 정육각형인 자신을 미워했다니. 무난해진 이제는 나의 마음에 자리한 질투가 기쁨이에게 콘솔 지휘권을 넘겨주었으려나. 어쩌면 학창 시절을 지배한 질투도 불안이가 대신하여 내세운 여린 감정이었을 테지. 그렇게 어린 날의 감정에게 화해를 건네는 예쁜 영화를 만났다.
This film is dedicated to our kids.
We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이 영화를 우리 아이들에게 바칩니다.
너희 모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Pixar, <Inside Out 2>,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