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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Sep 07. 2024

불안을 즐기기

매일 바르는 기초화장품이 똑 떨어졌다. 번들로 구매하다 보니 거의 다 쓸 때까지 마지막인 줄 미처 몰랐다. 연말에 있는 정기 할인을 기다리자니 그동안은 어쩌지 싶고, 지금 주문하자니 정가로 사는 게 괜히 손해 보는 듯하고. 혹시 더 부족한 건 없는지 찬장 속 재고를 파악하다 쓰임을 기다리고 있는 새 물건들이 별안간 갑갑하다. 평소 같았으면 불편을 해소하는 게 1순위라 비용의 손해를 보더라도 당장 구매했을 텐데, 이번만큼은 내키지 않았다.

계획적이란 말은 그 계획이 틀어졌을 때 대비할 방법까지 헤아린다는 뜻이다. 이 성정은 대체로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다섯 수, 열 수 앞까지 내다보다 보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란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채비하면 이내 편안해졌다. 맛있는 건 남겨 뒀다 천천히 먹었다. 좋아하는 스티커는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 두었다. 물건을 구비할 때도 동일하다. 먼 훗날 이것을 다 쓰고 새로 구비하기까지 며칠 불편해할 상황이 싫어서, 궁한 것보단 남는 게 마음이 편해서, 대용량이 저렴하다는 명분까지 더해 온 집안을 그득하게 채웠다. 스스로의 불안을 철저한 준비로 해소한 것이다.

그렇담 부족함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물건을 보고 풍요로움을 느끼면 될 텐데. 빈틈없는 공간을 견딜 수 없는 건 무슨 아이러니인지. 대척점에 있는 양 극단의 마음을 품는다. 모든 게 갖춰져 있어야 하는 건 공백을 대처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를 살벌한 경쟁 사회에 내던져 놓은 것만으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스스로와 겨루며 난이도를 높였다. 잠시 방심한 새, 벌어진 사이로 화살이 날아올까 한껏 긴장하며 전신을 무장한 자신을 본다. 지금의 불편은 참을 수 있으면서 미래의 거북함은 감수하지 않으려는 아집. 만약에, 혹시나, 어쩌면, 하는 가정으로 현재보다 미래를 살고 있는 나.

지금을 살아보기로 했다. 불편과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낸다. 비록 그 처음은 다른 것으로 대체한 로션이지만, 미약한 시작에도 끝은 창대하리라는 믿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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