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그리고 한 살에 처음으로 집을 사다
집을 사는데 돈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집을 사야겠다고 결심한 지 일 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월세로 첫 주거를 시작해 '전세-주택구매' 단계를 넘지 못하셨다. 나 역시 월세로 독립하면서 10년 가까이 남의 집을 빌렸다. 월세 삶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사는데 불편함이 없었고 부동산 투자에 관심도 없어 집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 봄 사소한 이유로 집을 사야겠다고 결심 했다. 월세 계약 기간 절반이 지나갈 무렵 이사 갈 집을 알아보았다. 한 부동산 유리에 붙은 매물 목록을 보는데 '매매' 물건을 제외하고 전세,월세 소개 마지막 문구가 모두 동일했다.
‘반려동물 불가’
고백하건대 나는 꽤 괜찮은 임차인이다. 형광등, 수전, 문고리 등 사소한 하드웨어는 직접 수리하며 장마철 누수정도는 그러려니 넘어간다. 벽지를 직접 교체하기도 하고 월세는 계약시작과 동시에 자동이체를 걸어놓는다.
그런데 강아지와 살기 위해서는 매번 ‘을’이 되어야 했다. 집을 고르기 위한 선택지는 몹시 좁았다. 언덕 위 오래된 구옥, 반지하, 아니면 비싼 오피스텔 정도가 반려동물과 살 수 있는 집이다. 억울했다. 같은 돈을 쓰면서 내가 원하는 조건으로 집을 고를 수 없다는 것. 답답하고 아쉬운 마음이 터졌다.
조건에 맞는 월셋집을 알아보는 것을 그만두고 집을 사기로 했다. 집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40년 만에 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집을 샀다. 결심이 서고 실천하는데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집을 찾고 구매하는 모든 과정은 빠르고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벌처럼 빠른 행동엔 나비 같은 마음이 필요한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집을 사는 데 돈은 충분조건이지만 필수조건은 아니었다. 우리는 돈이 있다고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사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내 취향에 맞는 것을 엄선하여 적절한 시기에 물건을 구매한다. 집도 마찬가지다. ‘결심’이 '행동'으로 이어진 것은 돈 문제만큼이나 ‘집을 사야 하는 동기와 필요‘의 문제였던 것이다.
나의 집을 세우는 데는 세 가지 기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언제 나의 집을 사면 좋을까? (*부동산 투자 관점은 제외하였다.)
첫 번째는 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분명해졌을 때이다. 집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한 계획이 첫 번째 기둥이다. 나의 30대 집은 거대한 침대였다. 월세든, 전세든 호텔이든 상관없었다. 잠만 해결되면 그만이었다. 이직을 하면서 출퇴근 장소는 압구정, 양재, 마포, 목동으로 바뀌었다. 어느 한 동네에 정착하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출퇴근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사는 동네를 바꾸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40세가 되니 회사에 따라 일상을 맞추기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기준으로 회사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의지로 삶의 변수를 조금씩 줄여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매일 반복적으로 하는 일들이 생겼다.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은 카페에서만 가능하다. 대신 집에서는 스트레칭을 하고 소설을 읽을 수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집에서 무엇을 할 때 가장 생산적인지,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지 알게 되었다. 집은 나의 삶에 맞는 도구가 되었다. 집은 나의 선택에 따라 힐링 공간, 창작실, 반려견 놀이터, 쿠킹 스튜디오, 독서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나를 잘 알아야 나에게 맞는 집을 살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시간’이다.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집을 사는 데 필요한 시간과 집을 관리하는 시간이다. 자신에게 맞는 집을 찾는데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이 걸릴 수 있다. 발품을 팔아야 하고 매일 네이버 부동산 앱에 들어가 온라인 임장을 떠나야 한다.
리서치와 현장 실사, 그리고 비교 검토, 계약과 협상, 등기와 세금신고, 이사까지 집을 사는 과정은 길고 복잡하다. 여기에 적지 않은 시간이 든다. 환불과 반품이 되지 않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집을 사도 바로 입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오래된 집이면 부분수리,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 이 역시 적어도 한 달 에서 삼 개월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새 집에 들어간다고 치자. 그렇다고 집에 관한 시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소유하는 순간 집은 ‘관리’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바람이 세게 불면 창문이 깨질까, 비가 오면 누수, 환기를 안 하면 곰팡이가 생길까 계속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보일러, 수전, 전기, 가스 등 집에 들어간 기계장치는 소모품이다. 생각보다 고장이 잦다. 호텔 숙박비가 비싼 이유는 이 관리 영역이 나에게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시설 관리는 꽤 많은 돈과 시간이 드는 영역이다. 만약 나다운 집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집이 오히려 애물단지가 될 수 있다.
세 번째 조건은 ‘돈’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집을 살 만큼 충분한 현금을 갖기 어렵다. 대신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번에 큰돈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자신의 ‘신용’을 ‘대출’ 바꾸는 것이다.
집을 구매할 때 '높은 신용'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직장이 있어야 하며 근속 일수가 길어야 한다. 급여가 높을수록 좋고 카드 연체는 없어야 한다. 어찌 보면 집을 사기 위한 자금 마련은 20대부터 시작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은행 대출 창고에서 앉으니 그동안 나를 거쳐간 돈의 역사가 ‘주택자금’으로 순조롭게 바뀌었다. 놀라웠다. 어쩌면 평생 모을 수 없는 돈을 신용으로 한 번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신용을 만드느라 30대 매일 직장에 출근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택금액에서 75%, 1억 8천만 원을 대출받았다. 이제 집을 살 수 있는 마지막 요건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대출을 받기 전에 여유 자금을 계산해 보아야 한다. 나의 경우는 회사를 그만두어도 3년에서 5년 정도 대출금과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대출을 결심했다.
무언가를 공중에 세우려면 최소 세 개의 기둥이 필요하다. 두 개면 불안정하고 세 개면 중심을 잡아 설 수 있다. 나의 집을 세우는 데 라이프스타일, 돈, 시간이라는 기둥이 필요하다. 그리고 집을 더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네 번째 기둥을 꼽으라면 ‘함께 거주할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집을 알아보고 구매하고 고치는 과정은 혼자 하기에는 꽤 벅찬 일이다. 취향과 목적이 녹아든 공간에 대화가 잘 통하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네 번째 기둥 ‘사람’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일단 생략하겠다.
자, 이제 집을 사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