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것과 남길 것
철거란 보통 아무것도 없는 상태 만들기, 디자인을 하기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거를 하는 순간 디자인 절반이 완성된다. 이것은 기존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엇을 남기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간에 남긴 흔적은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밑그림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빈티지 무늬가 있는 화장실 타일을 유지할 것인가 없앨 것인가. 방문을 제거하여 공간을 확장할 것인가 말 것인가. 오래된 나무 바닥, 천장을 둘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 철거를 시작하기 전 정해야 할 것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철거하기 전 어떤 스타일과 구성으로 집을 완성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철거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비용과도 직결된다. 그리고 한 번 철거된 것은 깨진 접시처럼 '완벽한 복구'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철거를 하기 전, 다음 사항을 염두하여 시작하면 좋다.
철거와 디자인
인테리어에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세월과 함께 변색된 벽지, 적당히 마모된 나무 손잡이. 이제는 생산하지 않는 빈티지 타일, 브랜드를 찾을 수 없는 샹들리에 조명과 스위치, 장미 무늬가 있는 간유리와 굴곡 있는 알루미늄 프레임. 이러한 인테리어 요소는 오직 그 공간에만 존재한다. 낡음을 제거하고 새로움을 입히는 과정이 인테리어 디자인이지만, 오래된 제품을 잘 활용하면 오히려 공간의 개성과 무드를 한층 끌어올리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철거와 인테리어 비용
철거 범위는 인테리어 비용과 비례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철거를 많이 하면 할수록 비용이 크게 상승한다. 벗겨낸 벽면은 벽지나 페인트, 또는 타일로 덮어야 하고 에어컨을 제거했다면 재설치를 해야 한다. 별거 아닌 요소처럼 보이는 것도, 막상 새로 제작하려고 하면 비용과 시간이 든다. 예를 들어 방문을 교체한다고 하자. 새로운 문을 달려면 '실측-디자인-제작-현장 설치' 단계가 필요하다. 방문 하나 교체하는데도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존 공간에 붙어 있는 작은 요소라도 철거 전, 이것을 다시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지 고민해 봐야 한다.
철거 공지와 소요 시간
20평 내외의 공간이라면 철거는 하루 만에 끝난다. 다른 공정에 비해 소요 시간이 짧다. 시간이 짧고 변화는 큰 만큼 공사 소음과 먼지가 '어마어마'하게 발생한다. 동네 주민들 잠을 모두 깨울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철거 전 반드시 날짜와 소요시간을 이웃에게 알려야 한다. 나의 경우는 철거 일정이 잡히자마자 공사 일정을 정리해 빌라 입구 게시판에 부착하였다. 식빵을 7개 구매하여 윗집, 아랫집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메모와 함께 돌렸다.(아파트라면 사전에 공사 동의서를 사전에 받아야 한다)
나의 집이 예뻐지는 시간 동안 누군가는 소음과 진동으로 고생할 수 있다. 이웃주민과 사전에 인사를 나누고 상황을 설명하면 대부분 이해해 준다. 특히 철거, 바닥 시공(마루를 깔 경우 고무망치 진동이 생긴다), 목공(나무 자르는 소리)을 하는 날은 현장을 수시로 확인하며 문제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나의 집이 산속 깊은 곳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도시에서 인테리어 공사는 누군가의 배려 없이는 불가능하다.
철거 이후 할 일
집 전체 철거를 하였다면 조명과 화장실, 부엌이 사라져 있을 것이다. 이제 집은 야외 공간과 거의 같다. 그런데 빛이 없다면 다음 공사를 어떻게 진행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전기 공사 들어가기 전, 빛이 없을 경우 이동형 조명기를 설치한다. 또는 형광등이 있던 자리에 임시로 전구를 다는 방법도 있다.
철거를 하면 베란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냉수, 온수 수도꼭지 두 개가 남아있다. 철거를 하더라도 물은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화장실'이다. 공사현장에 최소 5시간 이상 머물러야 하는데 화장실이 없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집 주변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만약 공중 화장실이 없다면 근처 카페나 식당에 도움을 구한다. 공사 기간 동안 화장실 이용 대가로 소정의 돈을 드리거나 커피 쿠폰을 대량으로 사서 화장실을 이용한다. 추가로 철거 현장은 당연히 인터넷도 없으니, 소형 라디오를 구비해 두면 좋다.
우리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전기가 발명되지 않고 인터넷이 없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철거 직후 공사현장은 이러한 상상을 현실로 보여준다. 빛과 수도 시설, 인터넷이 사라진 세상말이다. 공사 현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집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스위치로 빛을 조절하고 온수와 찬물이 번갈아 나오는 곳. 개인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집’은 한 시대 발명품의 총합이었다. 밖에 나갈 필요 없이 동일한 장소에서 ‘먹고 마시고 쉴 수 있다’ 는 것은 개인 삶에 기적에 가까운 시간 효율성을 보장한다.
이러한 집 덕분에 우리는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고 글을 쓰고 커피를 내릴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화장실을 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