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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칠레 Jan 15. 2017

파나마 운하 이야기

인간의 꿈, 열정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힘 

2013년 한진해운 사보에 기고했던 글을 수정해 올려봅니다

A Land Divided, A World United.


니카라과 운하


2013년 6월.. 중앙 아메리카 멕시코와 파나마 사이에 위치한 니카라과에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두 번째 운하가 건설된다는 외신이 보도되었습니다. 중국의HKND라는 민간개발회사가 니카라과 정부로부터 운하 건설권과 100년간 독점 운영권을 획득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2014년 중순 첫삽을 뜨기시작해서 2020년대 초반 완공을 목표로 진행중입니다. HKND 왕징 회장은 중국에서 통신회사를 운영중인 40대 초반의 젊은 사업가로, 그동안 건설, 인프라 사업과는전혀 연관이 없었던 미지의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미국 앞마당으로 바로 진입하면서 미정부와 마찰을 최소화 하기 위해 중국정부가 전면에 내세운 민간회사가 아닐까 하는 추측성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기 이전, 미국 의회 산하, 중미 운하 건설지 타당성 조사 위원회에서는 운하 건설을 위한 최적격지로 두 차례나 니카라과를 선택했던 의외의 역사가 있었습니다.현 파나마 운하는 80km에 불과한 반면, 니카라과에 건설될 운하는 그 길이가 260여 km로, 파나마의 세배가 넘는데 말입니다. 파나마 운하가 완성된 지 100년이 지난 시점에, G2 중국이 다시한번 니카라과를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제 2의 운하건설지로 선택한 겁니다.  



달과 6펜스


“고전이란…제목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학창시절 세계명작전집 중에서 몇몇 권을 펼쳐 보기는 했지만, 마지막 장까지 넘긴 기억은 한 손가락에 꼽습니다. 지루한 내용전개에, 문장은 길고 복잡하며, 그저 소설적 형식만 따온 철학적 사색 작품들이 대부분이니… 

인문학바람을 타고 고전을 한권 골라 봅니다. 제목에 어떤 아우라가 느껴지는 소설“달과 6펜스”. 한때는 대학가 주변 낡은카페 간판으로 꽤 눈에 띄었던, 노벨 문학상 저자 “서머셋 모옴”의 소설입니다. 안정된 직장과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던 중년의 주식 브로커가 어느 날갑자기 짤막한 편지 한 장만 부인 앞으로 남기고 파리로 떠납니다. 그 나이에 이류화가로나 성공하겠냐는 주위 빈정거림에 주인공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쨌든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소?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오. 물에 빠지면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는 문제 될 수 없지않소. 그 물에서 헤엄쳐 나오던가, 아니면 빠져 죽는 수밖에 없지 않소?”

잠시 찾아왔다가 곧 떠나버리는 봄바람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벌이가 없는 3류 화가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합니다. 여인숙 한켠에서 영양실조로 거의 죽어가고 있었을 때, 평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던 동료화가가 우연히 발견 합니다.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는 헌신적인 간호로 3류 화가를 살려 놓습니다. 강한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던가요? 집으로 들이기를 극렬 반대했던 동료화가의 부인은 3류 화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전 잠깐씩 스치던 주인공의 야수적인 눈빛에서 이런 결말을 이미 직감했기에 집으로 들이는 것을 극렬 반대했을 겁니다. 서서히 건강이 회복되고 둘 간의 이상기류를 동료화가가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성만으로는 제어될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안주인은 쫓겨 나가는 주인공을 무작정 따라 나섭니다. 순박한 심성의 동료화가는 사랑하는 부인이 타인에게 모든 마음을 다 빼앗긴 것에 고통 받으면서도, 그렇게 나가서 무일푼으로 살아야 하는 두 사람의 비참한 삶이 눈에 밟혀 차마 쫓아 내지 못합니다.


두 사람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짐을 싸서 나옵니다. 진정한 비극이 완성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에게 버림받은 동료화가의 부인은 자살 합니다. 비운의 동료화가는 분노를 삭이며 부인의 유품을 정리하러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무도 없는 텅빈 집 한켠에서 심장이 멎어 버리고, 눈이 번쩍 떠지는 작품을 발견합니다. 복수심을 하찮은 감정으로 만들 정도의 명작이었습니다. 동료화가가 모든 증오와 복수심을 내려 놓고, 고향으로 떠나게 한 그 작품은 부인의 누드화였습니다. 


세상의 평판이나 관습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열정에 대해서만 온전하게 반응한 삶을 살았던 한 천재의 이야기입니다. 이곳 저곳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고, 음미하면서 다시 한번 읽게 되는 부분도 적지 않은 것이, 가슴속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하는 소설입니다. 물론 주인공이 남긴 그림이 그렇고 그런 수준에 그쳤다면, 그저 한 명 사이코패스와 치정으로 가득한 3류 소설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나마운하 건설노동자 고갱


“달과6펜스”는 노벨문항상 작가 서머셋 모옴이 프랑스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삶을 모델로 쓴 소설입니다. 실제로 고갱은 30대 중반까지 주식 중개인으로 일했습니다. 1880년에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해서“대양연결주식회사”가 설립되고, 프랑스에서 주식이 발행되면서 당시로는 역사상 가장 큰 투자자금이 모였습니다. 주식 브로커로 일하던 고갱은 경제적으로 부인과 다섯 자녀에게 꽤 괜찮은 남편이자 아빠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1882년, 19세기 프랑스 최대의 금융위기가 닥치며 실업자가 된 고갱은 가족을 이끌고 처의 고향 네델란드로 이주합니다. 네델란드에서 직물 세일즈맨으로 일하던 고갱은 갑자기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째 딸만 데리고 파리로 떠나 그림을 시작합니다. 수입이 변변치 않은 3류화가의 일상은 비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빵과 물감을 사기 위해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파리 홍등가 밤거리 가이드를 하기도 합니다.

구글 이미지 :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고갱


진정한 예술가에게 방랑기는 필수일까요? 1887년, 유년기 향수가 남아있던 라틴아메리카로 떠납니다. 파나마 운하 공사현장에서 일자리를 찾고,막노동을 시작했습니다만, 파나마 운하 건설 회사의 파산으로 두달 만에 파나마를 떠나게 됩니다. 세계 미술계 입장에서는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겠지요!? 프랑스가 진행했던 7년여의 파나마 운하 공사 기간 동안 무려 26,00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프랑스 “대양연결 주식회사”의 파산이 조금 더 지연 되었다면, 이름 모를 수많은 인부들의 운명처럼 고갱도 말라리아나 황열병에 걸려 아무도 기억 못할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고갱이 파나마에서 돌아온 후, 화구상인 고흐의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두 천재는 두달 동안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한지붕아래 살며 예술적 교감을 나누고,서로의 재능을 발전시켰습니다. 고흐가 말년에 남긴 수많은 명작들이 고갱과의 동거생활 이후에 완성되었습니다. 만약, 프랑스의 파나마 운하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고갱은 조금 더 오랜기간 운하 공사일을 했을 것이고… 고흐의 명작들도 오늘날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요?

고흐가발작을 일으키며 스스로의 귀를 자른 사건은, 떠나려는 고갱을 붙잡기 위한 행동 끝에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흐에게 고갱은 단순한 동료화가를 넘어 경외심을 갖게 했던 천재였습니다.

구글 이미지 : 고흐가 그린 고갱
구글이미지 : 고갱이 그린 고흐













황금이 흐르는 강


16~19세기 서양인들에게 가장 유명했던강이 어디였을까요?

현 파나마에위치한 “차그레스(Chagres)강”입니다.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오랜 시간동안 “황금이 흐르는 강”으로 불린 곳입니다. 16세기 잉카의 금,은이 페루에서 선적되어 파나마로 운송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잘록한 파나마 지협을 통과한 후, 대서양쪽 항구 (현 콜론)에서 대기중인 스페인 군함으로 환적 되었습니다. 파나마 지협 통과는 약 절반은 육로로, 그리고 그 나머지 구간은 차그레스강을 따라 카누를 띄워 수로를 이용했습니다. 16세기, 전 유럽을 호령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는 파나마 지협통과길에 Kings Highway라는 이름을 하사합니다.


스페인이 잉카를 점령한지 300년… 잉카의 금과 은은 바닥을 드러내고, 자연스레 차그레스강의 존재감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던 즈음입니다. 전혀 새로운 곳으로부터 다시 한번 황금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1848년,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입니다. 미국의 영토로 갓 편입된 이곳에서 황금이 발견됩니다.캘리포니아 황금은 잉카의 금,은이 운송되었던 길, King’sHighway를 똑같은 방식으로 통과합니다. 중미의 작은 강에는 또다시 황금이 흐르기시작합니다. 


골드러시, 골든게이트, 골든브릿지와49ers


캘리포니아 황금에 관련한 소식은, 뉴잉글랜드(미동부)의 몇몇 신문에 기사화 되면서, 과장된 소문이 급속도로 퍼집니다. 길가에 채이는 돌을 집어보니 황금이고, 금을 캐는 광부들이 모이는 선술집 마루만 쓸어도 주머니가득 금가루를 채운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집니다. 남들이 먼저 다 주워가기 전에 한 몫 챙겨야 합니다.너도 나도 새로운 황금의 땅, 기회의 땅, 캘리포니아를 향해 떠납니다. (모두 같이 명곡 “캘리포니아드리밍”을 흥얼거리면서… 아.. 마마스와 파파스가 아직 활동하기 전이군요.ㅎ)


1849년 Gold Rush를 통해 전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이주민들은 “49ers”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약 100년 후,샌프란시스코를 연고지로한 아메리칸 풋볼팀이 생깁니다.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처음으로 미서부지역에 창립된 이 프로 구단은 팀명을 “San Francisco 49ers”로 정합니다.길지 않은 역사에서 “49ers”는 캘리포니아인들에게 뜻 깊은 선조였습니다.


캘리포니아는막 멕시코로부터 넘겨받은 땅입니다. “Gold Rush”를 통해, 채 천명이 안되던 샌프란시스코 인구가 일 년 만에 2만5천명을 넘습니다. 적당한 이름이 없이 ““Boca del Puerto deSan Francisco (Mouth of San Francisco Port)”로 불리던 샌프란시스코만 입구에 자리한해협은 Gold Rush의 영향으로 ”Golden Gate”라는 이름을얻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인 다리로 알려진“Golden Gate Bridge”가 훗날 건설됩니다. “ 걸어서 이 다리를 왕복하면사랑이 이루어진다”라고 소문이 무성합니다. 하기사…70여미터 난간 아래는 태평양 푸른바다… 석양을 바라보며 수킬로미터를 함께 걷는데,어느 커플이든 사랑이 싹트지 않을까요? 남자끼린들 감정, 우정이 안 생길까요? 그래서 샌프란시스코가 동성애자들이많은가라는 어이없는 생각도 해봅니다.ㅎ

google image

황금에 대해서 인간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 넘는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골드러쉬”가 시작되기 200년 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찾아왔던 청교도들이 꿈 꾸었던 아메리칸 드림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향한 열망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황금을 쫓는 캘리포니아 드림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푼 희망을 품고 서부로 향합니다.남미 최남단을 돌아 올라가는 2만 킬로의 멀고도 험한 여정은, 황금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당연한 고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젤란해협에 자리한 칠레 최남단 항구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와 칠레중부에 위치한 발파라이소(Valparaiso)가 캘리포니아를 향하는 배들의 중간 기착지로 번성을 누립니다. 황금을 찾아가던 많은 사람들중 일부는 캘리포니아를 포기하고 발파라이소에 주저 앉습니다. 남반구의 파라다이스, 발파라이소가 칠레 최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1848 혁명과 슬픈 아일랜드

 

격변의 땅 유럽에서도 캘리포니아 드림을 찾아 나섭니다. 정말로 황금이 널렸는지는 그닥 중요한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살기 위해서 어디론가 떠나야만 했던 시대였습니다.

유럽을 뒤흔든 혁명이 프랑스에서 연이어 시작됩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1830년 7월혁명, 1848년2월 혁명....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큰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1848년 혁명입니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었던 혁명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배부르고 등 따뜻한 곳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 시민의 생활은 더 잃을 것이 없는 바닥 수준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굶주린“장발장”이 빵을 훔쳤고, 영국에서는“올리버 트위스트”가 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산업혁명에 따른 도시화로 농촌 소작농은 도시빈민으로 유입 되었고, 10대 초반의 어린 노동자들까지 밤늦도록 기계를 돌렸습니다. 


1848년은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해이기도 합니다. 아일랜드인들의 유일한 식량은 감자였는데..감자 마름병이 발생한 것입니다. 800만 인구 중 200만이 굶주려 죽었습니다. 4명중 한 명은 굶어 죽고 있는데, 벨파스트 항구 야적장에는 식민지배국인 영국이 수탈해 가는 밀과 옥수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먹을것을 찾아 200백만이 해외로 떠나면서 800만인구는 다시 400만으로 줍니다. 인류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인구 감소가 일어납니다.1848년 혁명은 다시 한번 프랑스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이번에는 혁명이 전 유럽으로 번지면서 오스트리아, 독일, 네델란드, 이탈리아등 주변 모든 나라의 정치, 사회 체제의 일대 변화가 일어납니다. 

Google image : 벨파스트 한 주택에 그려진 벽화.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위해서 역사는 기록되어야 합니다. 소녀상에 대한 논란은 이 기준에 맞추면 단순합니다.


이런 고난의세월 속에 유럽 서민들에게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것이 캘리포니아에서 들려온 황금소식 이었습니다. 일단 미국동부로 건너왔습니다. 미동부로부터 캘리포니아로 가는 방법은 3가지입니다. 우선, 육로를 이용해 대륙횡단을 하는 것은 시간,거리상 가장 짧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 원주민에대한 공포 속에서, 허름한 마차에 의지해 물 한방울 안나는 모하비 사막을 건너고, 험준한 로키산맥 넘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여정입니다. 다음은, 남극에서 불어오는 거대한 파도를 헤쳐야 하지만, 훨씬 안정적인 여정으로 남미대륙 남단을 돌아가는 바닷길이 있었습니다. 역시...거의 3달이 걸리는 긴 항정속에서 먹거리걱정과 전염병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다른 대안은? 황금이 흐르던 강 King’s Road입니다. 미 동부에서 카리브해를 지나 콜론으로 가는 정기선이 시작되었습니다. 뱃길을 절반이상 단축시킵니다. 콜론에서 카누를 타고 차그리스강을 거슬러 올라, 도보로 산을 넘어 파나마시티에 도착하는 지협통과 기간은 일주일 남짓이면 충분했습니다. 


고담시티


파나마시티에는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는 뜨내기들로 넘쳤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기꾼,먹을 것을 찾아 떠나온 아일랜드 빈민, 혁명의 혼란기를 피해온 유럽각국의 소시민…인생의 험한 굴곡이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Pacific Mail SteamshipCompany가 샌프란시스코-파나마간 정기선을 운항했습니다. 이 회사는 훗날 최초로 샌프란시스코-아시아간 정기선을 띄운 APL 입니다. 파나마에서 떠난 배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마자, 선원들까지 황금을 쫓아 떠나버렸기에… 새로이 선원을 모집중인 배들만 샌프란시스코만에 가득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바나 동물의 세계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바심으로 가득찬49ers들이 점령한 파나마 시티는 오로지 주먹만이 법인 “고담시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메리카 잘록한 허리를 통과하는 방법은 King’s Highway말고도 또 있었습니다.파나마  위에 위치한 니카라과를 통과하는 이주민들도 있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해운왕이자, 미국 역대 부자 순위에서 록펠러 바로 다음에 이름을 올리는 “밴더빌트”는 허드슨강 페리사업을 시작으로, 미동부 철도사업을 통해 거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밴더빌트는 "독점만이 수익을 담보"한다는강한 믿음과 원칙으로 독점사업을 영위하든지, 독점을 만들 수 없다면 사업을 포기하였습니다. 미 동부와 니카라과를 연결하는 노선을 시작합니다. 니카라과는 중앙에 거대한 호수가 있고 호수로부터 시작되는 강이 대서양을 향해 흐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간은 카누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파나마 철도


샌프란시스코에서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를 세운 William.H.Aspinwall은 밀려드는 49ers를 보며 새로운 사업을 떠올립니다. KingsHighway에 철길을 놓는 것입니다. 뉴욕증시를 통해 백만불 자금을 조달한 후,1850년 철도 건설을 시작합니다. 애초 예상했던 사업비 100만불은 첫 13km 건설에 바닥이 났습니다. 하지만, 건설된 구간까지만이라도 철도 이용을 원했던 49ers덕분에, 추가 공사비용은 완성구간을 이용하는 승객이 지불한 운임으로 조달 되었습니다. 1855년 두대양은 총 76km의 철로를 통해 연결됩니다. 처음 예상한 금액의 8배 공사비가 소요되었지만, 파나마 레일 회사는 상당기간 뉴욕증시에서 대장주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www.panamarailroad.org


80일간의 세계일주와 수에즈 쟁탈전


파나마레일 컴퍼니의 황금기는 또 다른 철로 개통으로 인해 막을 내립니다. 파나마 철도 완공 15년 후, 최초의 미대륙횡단 열차가 완성되었습니다. 1869년은, 두 곳에서 역사적인 토목공사가 마무리 된 해입니다. 5월, 최초의 미대륙횡단 열차가 완성되고, 11월에는 대서양,인도양 두 바닷물이 만납니다.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었습니다. 신의 영역이라고 믿었던 세상이 현실로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수에즈운하와 대륙횡단 철도로 인해“80일간의 세계일주”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신문에 연재할 때, 세계 각지의 해운회사들은주인공이 자신들의 배를 이용하는 것으로 써달라는 끊임없는 청탁을 넣었다고 합니다. 소설에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의 기차여행에 7일을 산정합니다.  


수에즈 운하를 성공시킨, 프랑스의 외교관 페르디낭 드 르셉은 세계적 영웅이되었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꿈꿔왔던 뱃길입니다. 젊은 장교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주재했던 18세기말, 나폴레옹은 경쟁국 영국을 단번에 누를 수 있는 방안으로 수에즈 운하 건설을 진지하게 검토 했습니다. 하지만,두 대양의 수위가 다르다는 측량 결과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르디낭 드 르셉스”는 서른살때 이집트 영사로 일하면서, 우연히 나폴레옹의 계획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꿈과 야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성공할 수만 있다면 피라미드를 건설한 고대 파라오의 업적을 능가하는 영웅이 된다는 꿈을 꾸면서, 수 십년에 걸쳐 이집트 권력층과 교류를 쌓습니다. 프랑스의 확장을 경계하는 영국과 지역의 맹주 오스만 투르크의 견제를 뚫고,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결국 수에즈를 완성시킵니다.동서양의 거리가 절반이상 줍니다. 앙숙 영국과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 전기가 마련 되었지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지요? 

운하가 완공된 지 6년 후, 절반의 주식을 소유한 이집트는운하 주식회사 주식을 매각합니다. 한발 앞서 정보를 입수한 영국은 이집트가 소유했던 모든 주식을 매입하고,수에즈 운하 운영권을 획득합니다.

바다를 가르고 길을 낸 모세 vs 땅을 가르고 바닷길을 낸 페르디낭 드 레셉



신이 되려한 인간과 이카루스의 추락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부와 영예는 다 얻었지만, “페르디낭 드 르셉스”는 또다시 신의 영역에 도전합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수에즈 운하를 성공시킨 영웅에게,훨씬 짧은  파나마 지협을 파내는 것은 그닥 어려워보이지 않았습니다.

페르디낭드 레셉의 말과 글은 그 시대 최고의 신용입니다. 레셉의 이름만으로 자금이 모여듭니다.큰 어려움 없이 “대양 연결 주식회사”는 공사자금을 확보합니다. 프랑스의 축적된 토목기술력은 세계 최고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운하 건설방식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지만,(갑문식 운하 제안) 페르니낭 드 레셉스의 마음속에는 이미 수에즈에서 대성공을 거둔, 해수면 높이 운하 방식만이 자리잡고 있었고, 세계제일 프랑스의 토목 건축 기술력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호랑이는 토끼 한마리를 사냥할때도 최선을 다합니다. 실패는 방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젊은날의 집요함과 총기를 잃었을까요? 공사를 시작하기 이전, 페르니낭 드 르셉은 단 한번 파나마를 방문했을 뿐입니다. 그가 본 건기의 열대지방은 파란하늘과 푸른숲이 어우러진 낙원의 모습입니다만, 우기때는 전혀 다른 이야기 입니다. 낙관속에 1881년 파나마 운하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사 시작 후, 예측 못한 장애물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인간의 발길이 닫지 않던 정글 속 원시림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견디기 힘든 습도와 온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모기떼, 황열병, 말라리아…어쩌면 수에즈는 사막의 모래를 파내기만 했던 작업입니다. 하지만, 파나마는 바위산을 깨나가야 했습니다. 수에즈는 지형과 기후에 익숙한, 수천년 전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베두인 후손이 파나갔던 공사입니다. 파나마는 먹거리와 일자리를 찾아 지구반대편에서 찾아온 유럽 미숙련 인부들과 카리브에서 건너온 흑인이 주축입니다.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믿고 찾아온 곳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문이었습니다. 최악의 시기로 기록된 1885년에는 하루에 50명씩 죽어 나갔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파낸 공사현장은 폭우에 떠내려온 토사로 다시 덮히는 일이 반복됩니다.


파나마운하공사의 핵심이자 가장 난공사 구간은 약 10 km에 걸친 “CulebraCut”입니다. 남북아메리카 대륙은 수만년전 서쪽으로 태평양판과 대륙판이 만나면서 융기한 로키와 안데스 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습니다. 중앙 아메리카 지역은 산맥의기운이 가장 잦아진 곳이지만, 역시 태평양쪽으로는 산맥이 병풍처럼 걸쳐 있습니다. 파나마에서 가장 낮은 지점은 해발 약 100미터 정도였지만, 수만년동안 버텨온 암석을 폭/깊이 모두 100미터 이상무려 10km를 파 나가야 했습니다. 엄청난 인명피해, 재산피해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프랑스의 “대양연결회사”는 1888년 파산합니다. 온갖 중장비는 그대로 정글에버려집니다. 쉼 없는 열정의 상징 페르디낭 드 레셉은 또하나의 기적을 이루어 신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은 추락한 이카루스가 되어 쓸쓸한 노년을 보냅니다. 

Google image : 파나마 운하 최대난공사 Culebra cut


먼로주의와 팍스 아메리카 


19세기초 미국 대통령 먼로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우리 아메리카 국가들은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너희 유럽 국가들도 이곳 아메리카에는 관심 끊어라”.먼로 선언은 여러 중남미 국가들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인류 보편적 정의에 기초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수백년간 중남미를 지배했던 스페인에 이어 호시탐탐 아메리카 지역을 노리던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에 딴 마음 먹지 말라는 강한 견제구를 날린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언문 뒤에는 아메리카대륙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려는 미국의 날카로운 발톱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이미 노쇠한 사자가 되었지만, 스페인은 여전히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최고 알짜배기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캐리브해의 진주 쿠바와 아시아의 보석 필리핀입니다. 떠오르는 신흥강국 미국이 세력을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길목에 이들 스페인 식민지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먼로주의를 들어 쿠바에서도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벌어집니다. 그에 따른 스페인의 강압적인 진압이 이어지자, 미국이 사태 해결을 위해서 끼어듭니다.


1898년 쿠바 하바나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의 군함 메인호에 원인모를 폭발이 일어납니다. 전함은 전소되고,미해군 266명이 사망합니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일까요? 미국은 스페인군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즉각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한창 힘 뻗치는 젊은 주먹에게 왕년의 늙은 주먹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은 쿠바에서 전쟁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인근 푸에리토리코와 아시아의 필리핀과 괌 에서도 스페인군을 향해 진격 합니다. 채 일년이 못된 1898년 말, 파리강화조약을 통해 스페인이 쿠바,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에서 물러나면서 알짜 해외영토는 모두 잃습니다. 아주 나중에, 쿠바에서 일어난 메인호 폭발 사건은 외부기뢰가 아닌, 선체내부 보일러실 폭발이 주 원인이라는 기밀문서가 1971년 공개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시발점인 베트남 통킹만 사건도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신문지상에서 도배를 해도,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이 스페인 세력을 완전히 밀어내고, 아시아의 필리핀과 괌까지 얻음으로서 세계 최강국 기틀을 다집니다. 하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을 끝낸 후 미국은 고민에 빠집니다. 전세계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즉 해군의 신속한 이동이 절실합니다만, 미국 해군은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분산이 불가피 합니다. 메인호 사건이 터진 후에, 태평양 함대가 전쟁 지원을 위해 쿠바로 지원을 떠났습니다만, 남미 최남단을 돌아오면서 거의두 달이 걸려서야 쿠바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니카라과 vs 파나마, 역사를 바꾼 우표 


사실, 스페인과의 전쟁 이전부터, 미국은 프랑스가 건설을 포기한 운하에 대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미국은 백지상태에서 운하 건설을 추진/검토하기 위해, 국회내 조사위원회를 꾸립니다. 위원회는1897년1899년 두 차례 파나마와 니카라과를 대상으로 실사를 합니다. 결과를 발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 공식 조사단의 선택은두 차례 모두 "니카라과"였습니다.


니카라과는국토의 폭이 약 260km 이상으로, 현재 건설되어 있는 약 80km의 파나마 운하보다 3배가 넘습니다. 왜 미국 조사위원들은 니카라과에 점수를 더 줬던 것일까요? 첫째 이유는 니카라과 호수입니다. 니카라과 중심에 위치한 중미최대의 호수 덕분에, 실질적인 운하 굴착 작업이 필요한 구간이 반으로 줄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니카라과호수에서 시작된 강이 대서양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대략 눈으로 봐서 90% 구간은 이미 어떤 형태로든 수로가 형성되어 있고, 조금 더 파내기만 하면 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끝으로, 태평양 쪽에 자리한 화강암 산맥을 뚫는 공사의 난이도 차이입니다.파나마에서 태평양쪽으로 산맥이 지나는 가장 낮은 지역은 해발 약 102m 입니다.하지만, 니카라과쪽은 약 56m로 절반에 불과합니다.10여년간 수많은 인명, 재산 피해를 낳고 프랑스를 결국 무릎 꿇게 한 난공사 구간입니다.또한 파나마에는, 우기때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챠그리스 강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을찾기 어려웠습니다. 챠그레스 강은 운하 예정로와 거의 직각으로 만나게 됩니다.


미 의회의조사보고서 결과로, 프랑스 운하 건설회사에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던 미국의 셀리그먼가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됩니니다. 미국이 프랑스가 포기한 파나마 공사를 인수하고 똑같은 자리에서 운하건설을 진행해야만 최악의 손실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1901년 루스벨트 정부는 니카라과와 파나마 두 안에 대해서상원투표를 통해 최종안을 결정하기로 합니다. 셀리그먼가는 최종 투표를 앞두고, 미 상원의원 한명 한명에게 로비를 시도하였지만, 대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낙담에 빠져 있던 셀리그먼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뉴스가 터졌습니다. 카리브해의 마르티크섬과 세인트 빈센트 섬에서 연이어 화산이 폭발해서 5000명이 넘게 사망한 것입니다. 뉴스를 본 셀리그먼에게 섬광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파나마에는 없고, 니카라과에는 있다!” 

니카라과의 아킬레스 건을 발견한 것입니다. 셀리그먼은 즉시 화산폭발그림이 그려진 니카라과 우표를 구해서 그 우표를 붙인 편지를 모든 상원의원들에게 송부하였습니다.니카라과 화산폭발 위험성을 최대한 강조하면서… 미상원 운하건설지 최종 표결3일전이었습니다. 결과는 4표차 파나마의 극적 뒤집기 였습니다.

www.stampmagazine.co.uk

1903 파나마 운하 공사를 시작하려는 미국 앞에 새로운 난관이 닥칩니다. 프랑스 소유의 파나마 공사권 및 사용하던 중장비를 미국이 4천만불을 지급하고 사들이자, 콜롬비아가 딴지를놓기 시작합니다. 합당한 금액을 지불할 것을 미국에게 요구합니다. 당시 파나마는 콜롬비아 영토였습니다. 미국은 파나마 독립세력을 은밀히 지원합니다. 파나마는 1903년 11월 독립을 선언합니다. 빽빽한 밀림 때문에 지금도 콜롬비아와 파나마는 육로 연결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100년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파나마시티와 콜론 앞바다에는 미 전함이 떠서 무력 시위중입니다. 콜롬비아는 눈뜨고 코 베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립 선언 이틀 뒤 신생 파나마공화국은 미국과 파나마 운하 건설권과 영구 운영권 계약을 체결합니다. 파나마는 무늬만 독립국일뿐입니다.  


 

실패의 답습


1904년 미국이 파나마 운하 공사를 시작 하였습니다. 많은 엔지니어들은 파나마가 최종 선택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어찌 되었건, 상당부분 프랑스가 진행했던 작업을 통해 운하에 대한 윤곽이 잡혀 있었고, 또 파나마에는 철길이 이미 가설되어 있었습니다. 작업물들을 이송하기 편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역시 프랑스가 실패했던 길을 그대로 1년 이상 답습하였습니다. 끝없이 질병으로 쓰러지는 사람들, 강철같이 굳은 화강암석층, 수시로 밀려 내려오는 흙더미.  범람하는 챠그리스 강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다시 처음의 상태로돌려 놓습니다. 미국내 여론은 점점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위대한 페르디앙 드 레셉이 실패한 공사를 어떻게 루스벨트가 이루어 낼 수 있을지라는 회의가 팽배해 집니다. 2년이 지난 후, 공사 총 책임자가 바뀝니다. 스티븐슨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공사를 전면 중단하고, 수개월간 열대병의 원인인 모기와 해충 박멸을 위한 대대적인 방역작업을 벌입니다. 

google image :차그레스강 범람으로 물에잠긴 중장비


Never too late.. 갑문 시스템으로 변경


옵션으로 늘 논의는 되었지만, 선택받지 못했던 locksystem을 도입하기로 결정합니다. 180도 사고의 전환입니다. 땅을 파내는 대신, 배를 밀어 올리는 것입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80KM에 이르는 구간을 해수면 높이로 똑같이 파내는 것을 포기합니다. 챠그리스강 하구에 댐을 쌓아, 파나마 내륙에 거대한 인공호수를 만들고, 양끝에는 갑문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범람하는 차그리스강을 다스리면서도 파내야 할 공사구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방안입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그럴 듯 했지만, 댐은 상류 골짜기를 막아 인공호수를 만드는 것인데, 대서양쪽 하구는 여느 강 하구와 같이 물길이 넓게 퍼지는 땅입니다. 이곳에 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km의 둑을 먼저 쌓아야 합니다. 또한, 욕조 속 오리배가 떠오르듯이, 수 만톤의 배가 24M 높이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과연 현실에서 가능한 것인지… 당시 최고의 토목건축 기술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가 공사를 진행하던 시기에도, 파산 일년 전 LOCKSYSTEM으로의 변경이 검토되면서 “구스타프 에펠”에 의해서 갑문이 설계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루스벨트와 스티븐슨에게는,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하는 시찌프스의 저주를 끝내야만 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파내기 공사를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선택은 옳았습니다. 결국, 6년에 걸친 공사후 댐이 만들어집니다. 댐 자체는 폭 220m, 높이10m에 불과하지만, 댐을 건설하기 위해 쌓은 둑은 무려 폭650m에 길이 2.5km에 달합니다. 둑을쌓은 흙과 돌은 태평양쪽 작업현장인 Culebra Cut에서 파낸 것을 운반해 온 것입니다.운하 양쪽끝에 건설된 각 3세트Lock의 규모는당시 건조중인 최대 사이즈의 미 전함이 통과하기에 넉넉한 폭 33.5m길이 304m 깊이 12.8m로 건설되었습니다. 

google image : Gatun Dam & Gatun lake
Gatun Dam, Gatun lake, Culebra Cut 위치



A Land Divided, A World United


1914년 8월, 미국이 공사를 시작한지 10년만에 드디어 태평양과 대서양이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개통식 슬로건은 “A land divided, a world united”. 하지만, 이 역사적인 파나마운하 개통식은 한달 전 유럽대륙에서 터진 세계1차 대전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운하는 전쟁을 통해 바로 가치를 증명합니다. 1917년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여할 때, 태평양 함대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즉각 대서양으로 투입되어 전세의 축을 연합군 쪽으로 바꿔놓습니다. 2차 세계대전말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했을 때, 대서양 쪽에 주둔하고 있었던 미 해군이 파나마를 통해 신속히 지원에 나설 수 없었더라면, 쉽게 일본군을 이기기 어려웠을 겁니다. 

2012년 총 14,500척의 선박이 통과하면서, 파나마는 운하수입으로만24억불을 거둬들였습니다. “황금이 흐르던 강은, 이제 스스로 황금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2000년 1월 파나마 운하는 미국에서 파나마로 반환되었습니다. 파나마 정부는 파나마 운하 개통 100주년 기념으로 파나마 운하 확장공사를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확장공사가 2년여 지연되면서 2016년 완공되었습니다. 114년전 4표 차이로 선택 받지 못했던 운명으로, 아이티 다음 중미/캐리브 최빈국으로 살아온 니카라과는 G2 중국과 손잡고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파나마에서 1만톤 이상급 선박이 통과 가능한 운하 확장공사까지 끝냈습니다. 니카라가 운하 건설 좌초설도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니카라과 운하공사가 계속 진행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긴 합니다.

 

하지만, 진정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또다른 운하가 건설된다면… 

20세기 파나마 운하를 통해 미국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지배하면서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했던 그 그림을, 21세기 중국은 니콰라과를 통해 꿈꾸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운물류에서는 파나마가 누리는 독점적위치가 흔들리면서, 어떤 많은 기회들이 떠 오를지...


20년 해운회사를 다녔던 눈으로 바라보는 니카라과 운하 소식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참고자료 : 달과6펜스 : 서머셋 모음

                고갱, 타이티의 관능 : 데이비스 스위트먼

                강철혁명 : 데보라 캐드버리

                월스트리트제국: 존고든

                화폐전쟁2: 쏭훙빙 

                슬픈 아일랜드: 박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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