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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 Dec 20. 2016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읽는 삶 만드는 삶 5

중·고등학교에서 읽기를 권장하는 필독서는 대체로 재미가 없다. 뻔한 교훈이 분칠되어 있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거의 학대를 당하는 수준의 아이들이 주인공이어서(어른들은 왜 이런 책들을 아이들에게 그토록 권하는 것일까? 늘 의문이다) 읽는 이들의 죄책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가 지나면 다시는 읽을 수 없는 책도 있다. 나에게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J. M. 바스콘셀로스 지음)가 그런 책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용돈이 많지 않아서 책을 사는 건 예외적인 지출이었다. 하지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고 『유리의 마음』을 직접 샀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아마 얇고 값이 싸서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바스콘셀로스의 책이 거의 번역되었지만 지금은 제제 시리즈의 연작 느낌인 『햇빛사냥』, 『광란자』만 출간되고 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섬에서 나왔다. 먼저 중학생이 된 오빠와 함께 인천에 살던 이모집에서 하숙을 했다. 중3이 된 오빠와 중1 여동생은 서로에게 거의 외계인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모는 엄마보다 열 살이나 많았다. 사촌 언니들은 이미 사회인이었다. 나는 혼자 자라야 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은 자기 연민이 되고 그에 대한 보상처럼 자아가 비대해졌다. 게다가 사춘기가 오고 있었다.

나는 어느 구석으로든 주목을 받기 어려운 아이였다. 성적이나 다른 재능이 뛰어나지도, 외모가 눈에 띄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치맛바람을 일으켜 줄 엄마도 없었다. 시골 학교에서야 아버지가 실내에서 일하며 다달이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라는 것만도 굉장한 후광이었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아이들은 대개 짝사랑의 대가가 된다. 그 국어 선생님이 그렇게 좋았던 건 점잖고 친절한 남자 어른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항상 머리 한 올 흐트러짐 없이 8:2 가르마에 옛날식으로 기름을 바르셨고, 복장은 넥타이에 양복을 고수하셨다. 이런 반듯함이 신뢰를 주었다. 희끗해진 머리를 굳이 염색하지 않으셨고 키는 크지 않았지만 체격이 적당하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미남이었다.믿거나 말거나. 다른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갓 부임한 장발 총각 선생님을 좋아할 때 나는 쉰이 넘은 국어 선생님이 좋았으니, 내 취향이란.


선생님 눈에 띄고 싶어서 얼마나 수업시간에 열심이었는지 모른다. 그때는 중학교 국어책이 작문, 문법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한 단원이 끝날 때면 단원 정리와 함께 작문 과제가 있었다. 참고서에 예시 답안 같은 게 있어 아이들은 그것을 베껴 가거나 안 해 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 숙제를 늘 열심히 해 갔다.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해 온 사람” 하면, 손을 번쩍 들었다.

숙제를 해오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으므로 기회를 얻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작문 숙제는 선생님께 내 존재감을 뽐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잘 웃지 않는 선생님이셨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학생을 모를 리는 없으셨겠지. 그래도 특별히 따로 알은체를 하신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떨리는 마음으로 교무실에 가 보았더니 여름방학에 중앙도서관에서 열리는 ‘도서관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인천 시내 각 중학교에서 뽑아 보낸 아이들이 방학 중 열흘 동안 도서관으로 출퇴근하며 추천도서를 읽고 독후감을 써내는 거였다. 학교마다 각 학년에 딱 한 명을 뽑아 보내는 거였고, 기준이라는 게 따로 없어서 대개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주어지던 기회였다.

그때는 스펙이니 뭐니 하는 게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다지 경쟁이 치열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다름 아닌 그 선생님께서 나를 콕 집어 추천하셨다는 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 열흘은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당시만 해도 중학교부터 남녀가 분리된 채 진학했기 때문에-고등학교 남녀공학도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처음 생겼다-교회 같은 곳에서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남녀 학생이 어울릴 수 있는 자리는 드물었다. 어쩌면 나만 모르는 다른 경로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선에서는 그렇다.

책도 읽었지만 남녀학생들이 모여 포크 댄스를 추는 프로그램 같은 것도 있어서 간혹 연애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꼭 일제 시대 이야기 같다. 남학생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외모로 남자들의 관심을 끌 만하지 않은 소녀들에게는 도도한 체념이라는 게 있다. 열심히 책이나 읽는 수밖에. 우리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떠도는 강의실에서 책을 읽었다. 추천도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천중앙도서관’이라고 작은 글씨가 찍힌 초록색 줄의 갱지 원고지에 연필로 독후감을 썼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두꺼운 원고지 뭉치가 강의실 앞 책상 위에 쌓여 있었는데, 종이를 가져가는 게 좋아서 틀리지도 않았는데 자꾸 집어 왔다.

도서관 학교가 끝나던 날 독후감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 장려상 정도의 작은 상이었지만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처음 인정받았던 경험이라 각별했다. 거기 함께 갔던 우리 학교 2학년 아이가 상을 받지 못했다고 하도 속상해하기에 내 상을 대신 줄까 생각했으니 상에 대해서는 대단치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상을 받았다고 특별한 격려나 축하를 해 준 사람은 없었지만 나를 추천해 주신 선생님께 면목이 섰다 싶어서 뿌듯했다.

무조건 나를 믿어 주는 한 사람, 때로는 그것이 삶을 바꾼다. 나를 도서관 학교에 추천해 주셨던 국어 선생님,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던 생물 선생님이 그걸 알게 해 주었다.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은 아무 존재감이 없던 나를, 나도 없는 자리에서 선생님이 직접 추천해서 작은 학급 임원 자리를 맡겨 주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준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중학교 때는 오로지 내가 사랑하고 나를 믿어 주는 선생님들께 실망을 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다. 사랑과 믿음은 누군가를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 정말 중요하다. 어쩌면 거의 전부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에 대해 뽀르뚜가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 마음속에는 모두 사랑의 씨앗이 있다. 하지만 그 씨앗을 틔우려면 누군가 필요하다. 사랑은 오로지 받는 것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아이들에게 폭력은 무언가를 망가뜨리고 빼앗아 간다. 자신이 쓸모없으며 잘못 태어난 아이라고 믿게 만든다. 가족에게 심한 매질을 당한 후 제제는 상상의 세계를 모두 잃는다. 상상 속 친구 라임오렌지 나무 밍기뉴 혹은 슈르르까도. 그건 제제에게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그 아이를 다시 살아나게 한 것은 “난 널 사랑한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라는 말 한 마디였다.

하지만 가장 좋아한 말은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것으로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제제의 말이었다.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척해야 했던 사람들을 죄책감 없이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이었다. 사랑은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들을, 우리가 견뎌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별하게 해 준다. 아울러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게 한다. 그 사랑이 아니었으면 제제는 뽀르뚜가를 잃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철이 든다는 건, 슬픔이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승의 날이 돌아올 때마다 선생님들 생각을 한다. 언젠가 꼭 찾아뵈어야지 하면서도 기억 속의 선생님을 잃고 싶지 않아 두렵다. 그래도 늘 생각한다.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그때 절 믿고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다고, 그 덕에 제가 조금이라도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선생님들께서 하신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꼭 알려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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