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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 Dec 27. 2016

어린 왕자

읽는 삶 만드는 삶 6

친구와 나눠가졌던 열화당판 『어린 왕자』 엽서 세트다. 번역자인 황현산 선생님께서 한 쪽짜리 글을 썼다. 포장지는 누렇게 바랬지만 엽서는 말짱하다. 도서관은 친구 없는 사춘기 아이들의 성전이고, 이 책은 경전이었다. 엽서에 적힌 책의 문구들은 기도문 같은 것이었으리라.


일주일에 한 번 작은 아들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 도우미를 한다. 학교에서 나눠 주는 종이를 한 번도 챙겨 온 적이 없는 아이가 신청서를 내밀기에 엄마가 학교에 와 줬으면 하나 싶어서 얼른 신청했다. 아이의 학교생활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품었다. 물론 다 헛된 꿈이었다. 첫날,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 학부모 사서의 역할과 할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은 좀 내성적이고 친구가 없는 아이들이 많아요.애정을 갖고 주의 깊게 살펴 주세요.”


아,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책은 친구를 잘 못 사귀거나 친구가 없는 아이들의 유일한 친구다. 그리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이런 아이들의 영원한 친구다. 나 역시 한때 이 책을 끼고 살며 밑줄 친 숱한 구절들을 친구들에게 적어 보냈다. 평론가나 다른 훌륭한 어른들이 어떻게 말하든 나에게 『어린 왕자』는 우정에 관한 고전일 뿐이다. 나는 사랑보다 우정을 훨씬 좋아한다. 뜨겁지도 변덕스럽지도 않기 때문이다.

불혹이 한참 넘어 이제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장면은 늘 같다. 두 소녀 혹은 소년의 모습이다. 텅 빈 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심각했다가 깔깔 웃었다가 하면서 귓속말을 나누는 아이들, 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에 학교 운동장 으슥한 나무 그늘에 무릎을 맞대고 앉은 아이들,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심 한복판에서 팔짱을 낀 채 오로지 서로에게만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

삶의 어느 순간에 겪어야만 하는 일은 그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거나 다른 걸로 메워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빈 채로 남게 된다. 지금까지도 이런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결핍은 종종 삶의 한 부분을 찌그러뜨린다. 사춘기 시절 내내, 친구들의 호기심을 끌고 싶어 특별한 사람인 체했다. 친구가 되고 싶은 아이를 골라 집요하게 편지를 썼다. 책에서 읽은 것, 말도 안 되는 유치한 레토릭으로 범벅이 된 편지들이었다.

한창 사춘기였으니 나나 그 아이들이나 그것이 우리만의 특별한 우정이라고 여겼다. 친밀감이 생기면 보통 화장실도 같이 가고, 등·하교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모여서 선생님이나 친구들 뒷담화도 하고, 밤샘 시험공부도 같이 하고, 소소한 나쁜 짓도 함께 하며 비밀을 공유하고, 이런 식으로 발전해야 하는 건데, 또 그렇게는 안 됐다. 그 와중에도 신비감과 관계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그런 우정을 요구하면 나는 그 아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가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너무 가까이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면 친구들이 다 나를 떠나고 말 거야,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가까워지려는 아이를 밀쳐 내서 깨진 친구관계가 한두 개가 아니다. 온갖 말로 우정을 맹세했던 친구들과 서먹해질 때마다 내가 우정을 나누는 방식의 불완전에 낙담하곤 한다.


친구에게 보냈던 그 숱한 편지마다 수없이 인용했던 『어린 왕자』를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다.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에 마음을 찔린다. 세상에 가장 어려운 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 너의 장미가 네게 그토록 특별한 것은 거기에 들인 시간 때문이라는 말. 자신을 길들여 달라던 여우. 어린 왕자가 오후 4시에 오기로 했다면 오후 3시부터 행복해질 거라던 여우의 말. 길들인 후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마음으로만 볼 수 있으며,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는 그 모든 말.

고등학교 때 친구와 이런 글귀들이 새겨진 ‘어린 왕자’ 그림엽서를 나눠 가졌다. 그런 말들이 과연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나 있었을까? 그 친구와 대학을 지나 결혼과 두 아이의 출산 후까지 만남을 이어 왔다.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하고 공부를 진로로 삼은 친구가 학위를 받은 후 대구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여름, 겨울방학이면 만났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둘 사이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처지가 많이 달라진 후였다. 정치적 견해가 벌어지더니 결혼관이 달라지고 아이에 대해서는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만날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이야기는 자꾸 어긋나고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길어졌다. 또 다시 변덕이 발동한 것일까.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다가 어느 날 친구와 연락을 끊고 말았다. 사춘기를 한참이나 지난 나이에 갑작스럽게 ‘절교’ 선언을 당한 친구는 황당해했다. 우리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서로를 길들이지 못했는가? 서로가 특별한 존재가 될 만큼 시간을 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좋아하는 석양을 보기 위해 기다려야 했는데 너무 성급히 자리를 떠난 것일까?

내가 잘못한 것이 어떤 것이었을까 그 친구와의 긴 세월을 되짚다가 우리가 조금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린 왕자는 좋아하는 석양을 보려고 하루에도 마흔일곱 번씩 자리를 옮겼는데, 우리는 점점 멀어지고 고도가 달라졌지만 조금도 자리를 옮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안정적인 관계가 주는 평화를 알게 되었고, 그 평화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조금 알게 되었다.

숙명이나 운명처럼 보이는 가족관계도 실은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십 년 가까이 혹은 그 이상 전혀 모르다가 만난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나머지 세월을 같이 하는 신기한 일회적 우연을 견고한 관계로 지속하려면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사랑과 감사와 미안함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 역시 지속되어야 한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완전히 다른 성격으로 자란 사람들이 어떻게 결혼이라는 의식 하나로 일심동체가 되어 하루아침에 말 안 해도 눈빛 하나로 다 통하는 사이가 된단 말인가.

우정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는 건 우연이지만 그 우연을 안정된 관계로 바꾸려면 매 순간 서로의 관계를 갱신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 자리는 끊임없이 바뀌고 그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단지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것만으로 좋은 관계는 지속되지 않는다. 한때는 뜨거운 우정에, 또 뜨거운 사랑에 목말랐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를 꾸미다가 지치면 관계는 깨졌다.

언제 식을지 모르는 뜨거운 관계의 불안이 싫어졌다.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도 그들이 있어서, 또 그들에게 내가 있어서 생각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그런 관계가 그리웠다. 어린 왕자와의 우정 때문에 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그를 생각하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어린 왕자』 속 비행사처럼.


아직도 저물녘에 놀이터 같은 데 나가 있다가 중3이나 고등학생쯤 된 여자 아이들이 서로에게 머리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울컥해진다. 그럴 때마다 학교가 끝나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오는데, 멀리 역광을 받으며 혼자서 땅바닥만 바라보며 타박타박 걸어오는 작은 아이가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존재 자체의 불안과 슬픔 가운데서도,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인간관계 속에서도 변함없이 내 옆에 있어 준 모든 분들께 새삼 고맙다. 아울러 내가 상처 준 모든 분들께 용서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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