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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 Jan 10. 2017

고요한 돈강

읽는 삶 만드는 삶 7

1990년대 대학교 앞마다 있었던 사회과학 전문 서점들에서는 러시아 현대 문학이 인기였다. 존경하던 동양철학과 교수님을 따라 학교 앞 다락방 서점에 들어갔다가 선생님이 산 책을 골랐다. 러시아 문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던 열린책들에서 현대 러시아 소설들이 많이 출간되었는데,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아직도 출간되고 있지만 알렉산드르 게르쩬의 『누구의 죄인가』는 절판 상태다.


90년대 초반 대학가에서는 현대 러시아 작가들의 책이 인기였다.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고전 작가보다 막심 고리키나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 같은 동시대 작가들이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들 말고도 지금 같으면 인지도나 문학사적 의미 차원에서 출간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 책들도 고리키나 체르니셰프스키와 같은 시대의 작가들이라는 이유로 번역이 되곤 했다. 제목도 『무엇을 할 것인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처럼 비장했다.

인기가 좀 있다 싶으면 어느 분야든 이른바 ‘발굴’이 이뤄진다. 출판에서도 어떤 계기로든 붐이 불면 작가나 작품의 범위가 넓어지고 그 두께가 고스란히 힘이 된다. 러시아 현대 문학 열풍 덕분에 당시 인기 높았던 막심 고리키는 『어머니』나 ‘〜시절 시리즈’ 같은 대표작이 아닌 『끌림 쌈긴의 생애』 같은 책까지 번역되었다. 그뿐인가. 중앙일보사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전 동유럽 작품까지 30여 권의 ‘소련 동구 현대문학전집’을 펴냈다. 출판에서도 상업성이 제1원칙이 되어 버린 지금 생각하니 참 대단한 시대였다.

월북 작가의 해금과 중국과의 수교 등 시대적인 변화가 맞물린 바람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쏟아져 나온 월북 작가들의 작품집을 주로 빌려봤다. 그 전까지 월북 작가의 작품은 글자 대신 본문의 여러 부분이 네모나 동그라미처럼 깨진 글자로밖에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책들이 특별히 재미있었다기보다 그동안 금지당해 왔던 것에 대한 욕망이 컸다. 이제껏 읽어 보지 못한 KAPF 작가들의 책은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아직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한국 문학의 까맣게 칠해 놓은 어느 부분을 나도 알아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 때문이었다. 혹시 내가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같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좋아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1988년 전집이 출간된 김기림의 책은 참 좋았다. 왜 이 책이 그동안 금서였을까 싶을 정도로 계급성이나 목적의식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며 1945년 해방 후부터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분단이 고착화되기 전까지의 한반도는 어떤 곳이었을까 상상해 보곤 했다.

그래도 7권짜리 『고요한 돈 강』을 읽는 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가 이미 196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아 이견의 여지가 없는 고전이요, 명작이었지만 방대한 양도 양이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길고 긴 러시아 이름과 어딘지 모를 지역을 따라가는 것이 버거웠다. 도서관에서 대출 기한을 연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반납한 후 다시 빌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7권을 다 읽었지만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러시아 중심부도 아닌 남러시아의 카자크 지방에 살았던 한 남자가 1차 세계대전과 혁명, 다시 내전으로 이어지는 시대적 격랑에 휩쓸리는 이야기다. 전쟁 과정에서 아군들의 잔혹한 행태를 통해 우직하게 믿었던 정의에 대한 신념, 윤리에 대한 이상이 흔들리고 자신이 죽인 적군들 역시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은 돌아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다. 지금 생각하면 전쟁을 소재로 하는 대하소설의 전형 아니었나 싶은데, 그렇게 격정적인 시간을 담은 책에 ‘고요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을 책을 재미있다고 느끼지도 않으면서 왜 그토록 기를 쓰고 읽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생각한 ‘교양’은 그런 것이었다. 세상에는 혼자서는 알 수 없고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도 없는 어떤 거대한 가치가 있는데, 그걸 알려면 힘들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이상한 믿음. 개인의 취향이라는 말이 없던 때였으니 이게 좋고 재미있다는 나의 감각적인 확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 충분히 경험해 보지 않은 것에 마음을 열어 두었다. 그러기에 좋은 시절이기도 했다. 서점의 서가를 가득 채웠던 소련 소설들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맞물려 인기가 시들해졌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동안 금지되었던 많은 것들이 풀려났다. 일본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한 일본 현대 문학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뒤이어 남미 문학도 쏟아져 들어왔다.

개인의 삶에 집중하는 하루키의 소설과 연이어 출간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일지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이 널리 읽혔다. 세상에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수많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서들도 쏟아져 나왔다. 중남미 소설도 이 시기에 많이 나왔는데,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출간되자마자 필독서가 되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남미의 식민지 역사를 허겁지겁 공부해야 했다.

뒤이어 말로만 듣던 ‘보르헤스 전집’이 출간되었다. 대하소설과 리얼리즘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했던 내가 이탈로 칼비노의 『코스미코미케』나 톨킨의 『실마릴리온』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컸다. 수만 년에 이르는 진화의 역사를 녹여 낸 것 같은 ‘코스미코미케’는 물속 시대가 끝나고 지상 최초의 척추동물을 할아버지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늙은 할아버지의 이름이 ‘ㅋ프우프ㅋ’였다. 도대체 이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한단 말인가.

시간적으로는 물고기 할아버지를 거쳐 공룡의 멸종에서 새들의 출현으로 이어지고, 공간적으로는 지구에서 달로, 다시 태양과 우주로 넓어지는 이 상상력을 나 같은 미물이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세계는 더 넓어졌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존재는 더 많아졌다.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고, 그래서 알아야 할 것들로 넘쳤다. 보아야 할 영화와 읽어야 할 책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객석 사이에 커다란 기둥 때문에 종종 화면이 잘리고 사람이 빼곡할 때(놀랍게도 그럴 때가 많았다!)는 사람 머리로 다시 화면을 잘라 먹는 예술영화 전용관 ‘코아아트홀’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문을 연 ‘씨네큐브’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보았다. 컬트 영화의 세계가 열리고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를 영화관에서 상영했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다시 책을 읽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잉그마르 베르히만, 장 르누아르, 시드니 루멧이 자신의 영화세계를 말하는 책이 번역되었고, 영화 비평서도 쏟아졌다. 영화 만드는 사람이나 읽던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는 필독서가 되었다. 영화와 미술, 사진에 관한 책들이 시리즈로 나왔다. 지금 보면 어떻게 이런 책을 기획하고 펴낼 수 있었을까, 용기 있다고 해야 하나 무모하다고 해야 하나 싶은 책들이다.

비로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그린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거대하고 절대적으로 옳은 하나의 가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아무리 열심히 알려고 해도 모르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고 지루한 것을 의무감으로 견디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낯선 것에 도전해보려는 용기, 재미없는 것을 좀 더 견뎌 보는 노력, 잘 모르는 것을 이해해 보려는 안간힘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재판관’의 마음이 아니라 ‘탐구자’의 마음으로. 잘 몰라서 그렇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좋은 것들이 아직 많을지도 모르잖아? 『고요한 돈 강』으로부터 20년 이상을 흘러 왔지만 그 책은 내게 그런 마음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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