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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 진범 Readen Aug 16. 2016

당쟁사가 뭐? 조선?

조선시대 당쟁사(이성무 지음) 1권 책 요약과 서평... 그리고 잡 얘기

갑자기 무슨 조선시대 당쟁사까지?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에 대한 책을 보겠다면서 어째서 먼 조선까지 지켜보는지 이래저래 의문이 든다. 이 책을 추천받았을 때 역시 그랬다. 역사를 좋아하는 내게 그냥 추천해주면 될 일이지 하고 생각했다. 이게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든지, 대선에서 패한 문재인 씨께서 봤다든지 하는 이런 미사여구의 추천이 많았다. 책을 읽으면서 그 의문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인간 보편사적으로 역사적・정치적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게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나 뭐 이런 의구심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저자가 맨 끝에 그 흐름을 밝히고 나서야 그저 아 이 정도로 생각해 볼 순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이 책을 흘려보내려는데 가끔씩 사극을 보거나 할 때 이 책이 기억에 남는다. 사극은 과거를 통해서 현대적 메시지를 계속 생산하고 있는데 이 책을 읽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랑 아주 약하게나마 다른 땅에 살던 누군가보다는 가깝다는 이 땅의 먼 조상들도 무시하지 못하겠다. 조선시대 당쟁사(이성무 지음)를 중심으로 이 부분을 살펴보겠다.


무엇이 당쟁? 어디서부터 당쟁


 당쟁이라면 말 그대로 당끼리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당이 있었나? 지금처럼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테고, 아 조선 중기에 붕당! 이 있었지 하며 고등학교 국사 수업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붕당(朋黨) 한자로 보니까 명확하다. 앞 붕은 붕우유신(친구끼리 믿음이 있어야 한다)할 때 그 붕이다. 친구라는 뜻이고, 뒤에 당은 더민주당! 새누리당 할 때 그 당이다. 무리라는 뜻이다. 간단하다. 친구 무리! 그러니까 당쟁사면 친구 무리끼리의 일이 되겠다. 이 친구가 단순한 친구는 아닌 듯하다.


 어느 스승을 따르냐 하는 학연, 어느 지역 출신이냐 지연, 가문이 어디냐 하는 혈연 등등으로 이루어진 무리이다. 이 세 갈래에 의해 붕당이 형성되거나 소멸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런 당파성에 주목해서 붕당이 후퇴한 정치라고 폄하하기 바빴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유학자들이 군자냐 소인이냐 나누며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힐난하며 정치권력만 탐하는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국무를 논하는 자리가 사사로운 것과 맞물려 있으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그들이 과거제를 통과한 유능한 인재라도 말이다. 다른 것에 집중한 사람들도 있다. 사림정치가 상호 간의 격렬한 비난과 비판을 기반으로 청렴함을 이루려는 시도였다 한다. (조선 전반기에는 붕당 외에 정치 집단이 있었다. 전반기부터 후반기까지 정치 집단에 따른 조선의 시기를 정리하면 사대부 시기, 훈신 시기, 권신 시기, 사림 시기, 탕평 시기, 외척 세도 시기가 있었다.) 이 책은 사림 이후를 간략히 정리하고 붕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상호 견제를 통한 청렴함을 이루려는 모습이 보이지만 대체로 이 격렬한 비난과 비판은 다수의 백성들과 괴리된 소리였으며 권력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너저분한 붕당이 너네 나라의 특수성 아니냐고 한다면 이 세상에 이 너저분한 권력투쟁 없었던 나라가 어디 있냐고 반문하고 싶다. 지금 그 조상들이 정치하고 있느냐고, 그걸 바탕으로 우리가 정치하고 있느냐고,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그때의 백성들이냐고 따지고 싶다. 더군다나 조선조 사람들은 글로 말로 싸웠다. 칼로 총으로 싸우지 않았다. 둘 다 지금과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피의 시대였다지만 과연 글말과 칼총중 무엇이 더 잔인했을까 반문한다.


붕당 정치의 기반 사림, 사림의 무대 3사, 3사의 꽃 이조전랑   


 붕당의 기반이 사림이다. 사림은 고려말부터 있었던 용어이다. 문무 관료와 그 일족, 벼슬하지 않는 선비를 통칭하던 말이었다. 이 말이 변화한다. 조선시대 세조의 쿠데타에 일조한 공신을 훈구파라고 하고 거기에 소외된 이를 사림이라고 하기 시작한다.  사림은 세조 때부터 서서히 관직에 진입하다가 예종조가 지나면서 대세가 되기 시작한다.


 사림은 3사를 기반으로 그 대세를 키우기 시작한다. 훈구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 3사가 무엇이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말합니다. 사헌부는 법(헌)을 맡는(사)기관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의 사법부 정도가 되겠다. 사간원은 헐뜯는걸(간) 맡은(사)기관이다. 언론비평 정도 되겠다. 홍문관은 두루두루(홍) 국정과 관련된 글(문)을 살피거나 자문하는 기관이다. 지금의 여러 자문기관이 되겠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쳐서 대간이라고 한다. 홍문관은 옥당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국정 실무에 참여하지 않을지언정 언론을 형성하고 정책에 대한 비판 혹은 지지를 표명하는 기관이다. 이들에 대한 추천이나 심사를 국정의 주요 책임자인 3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도 하지 않았고, 인사권을 지는 기구인 이조의 책임자도 하지 않았다. 인사권을 지는 이조의 정랑과 좌랑이 했다. 이들의 합쳐 이조전랑이라고 한다. 3 공과 이조판서가 임명을 하지 않은 건 견제 때문이다. 국정 권한이 많은 이가 3사를 임명하게 되면 본인에게 유리한 이를 임명할 것이 자명하다. 비교적 정치적 이해나 기반이 성장하지 않은  정 5품 이조정랑과  정 6품 이조좌랑에 맡겨둔 것이다. 고위직과 하위직의 구분과 그 임명에 대한 분리를 통해서 상호 견제를 유도하려던 제도였던 셈이다.


 대간보다는 옥당이, 옥당보다는 전랑이 더 강한 존경을 받고 힘을 얻었다. 대간 중에 옥당을 옥당 중에 전랑을 뽑았고 각 임명을 전랑이 하였기 때문이다. 옥당의 관원 중 정 5품과 6품이 전랑에 추천되지만 예외적으로 정 3품이나 종 4품이거나 이미 옥당 관원을 역임했던 이들도 추천되기도 했다. 옥당 관원이 되는 것 자체가 대간 중에서 관리직인 부제학의 추천과 투표를 통해서 이루어기 때문에, 전랑의 자리는 비교적 제도적으로 청렴한 이를 고를 장치가 잘 되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조전랑을 차지하는 이가 언론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조전랑이 삼사의 관원을 추천한다 앞서 말했는데 이 삼사 관원의 여론을 주도하는 이를 주론자하는데 주론자는 이조전랑과 국정 현황과 언론에 대해서 합을 맞춰야 했다. 이조전랑의 사림정치의 꽃인 이유는 이 비판과 감시, 언론 형성 기능을 통해서 여론을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붕당...


  고등학교 시절에 국사를 정말 좋아했다. 조선 중기 들어가기 전에 말이다. 이때부터 너무 어렵다. 뭔가 비슷비슷한 사건도 많고, 사건을 이렇게까지 알아야 하냐 깊은 회의도 들었다. 사건의 전개나 무게나 재미도 알기 전에 무조건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 결과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굉장히 오랜 기간 재미없는 부분으로 남아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건 전후 맥락과 그 의도와 그에 담긴 살벌함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며 많은 걸 느꼈다. 다만 사건 개개별로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나름대로 기억나는 사건이나 내용 중심으로 정리하겠다.


선조 (동인과 서인)  


 조광조 등이 제거되는 중종 때의 기묘사화를 겪으면서 사림들은 역사에서 실체를 감출지 알았는데, 그 지역적 기반으로 그들은 끝끝내 살아있다. 선조 초에 적극적으로 등용되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의 흐름 앞에 훈구세력과 권신들이 정치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사림이 정치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사림 분열은 동인과 서인이다. 분당의 기폭제는 이조전랑 자리였습니다. 사림이지만 외척이기도 했던 심의겸이 김효원을 이조전랑에 오건이 추천하자 반대했다. 사이가 안 좋았졌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드라마 여인천하의 이덕화!)의 문객으로 지냈던 걸 탐탁지 않아했고, 김효원은 존경받는 신진사류로서 외척인 심의겸이 마음에 안 들었다. 김효원이 동쪽에 살아서 동인, 심의겸이 서쪽에 살아서 서인이라고 한다. 최초의 분열이 두 사람 간의 시기와 반목에 있었다. 대체로 동인은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이 많았고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제자가 많았다.


 이 사건을 다루는데에서 이이의 인품과 학식을 본다. 붕당으로 찢어져 서로가 군자네 소인이네 외치고 있을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고 붕당의 폐단을 예견하고 시정하려 했다. 끊임없이 이 둘 사이를 조정했다. 대체로 동인이 우세했기에 동인을 억지하고 서인과 세력균형을 이루려 했다. 이런 이이가 당시에서는 교유관계 때문에 나중에는 그 제자들 때문에 서인의 상징이 된다니 참 어이러니하다.


 선조 때 발생한 사건 중에 정여립의 난이 기억에 남는다. 우선 정여립이 주장했던 세상이 당시에 생각하기 힘들던 혁명적인 사고였다. 대동사회나 신분제 철폐를 주장했다 했는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정여립이 이이를 존경하기까지 했던 서인이었다 것에 놀랬다. 그런데 이이가 죽자 이발의 동인으로 돌아선다. 이 때문에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시골로 쫓겨난다. 그런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 서인한테는 기회이다. 동인을 마구 잡이로 엮어서 정치보복을 감행한다. 친분관계를 반란의 동조 관계까지 억지로 연관 짓는다. 이 일을 담당했던 사람이 우리를 국어책에서 그렇게나 괴롭혔던 송강 정철이다. 그렇게 여리여리한 사모시를 지어놓고선 그랬다 한다. 사건을 지나치게 확장해서 3년 동안 죽은 자가 1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른바 기축옥사이다.


선조 (남인과 북인)   


 이제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 세상이 되었다. 잘 나가면 조심해야 한다. 세자 문제와 관련해서 영의정 이산해에게 모함을 받게 된다.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과 그 자식을 제거하고 세자를 세우려 하는 소문이 돈다. 선조는 믿지 않았으나 이내 경연에서 정철이 세자를 세워야 한다고 하자, 이 의심은 확신으로 변하게 되고 정철은 위기를 맞닥드리게 된다.  당연히 그 칼자루는 동인이 쥐게 된다.


 동인은 서인 모두를 응징하려는 강경파와 그 범위를 줄이려는 온건파로 나뉜다. 강경파가 북인이 되고, 온건파가 남인이 된다. 강경파의 정인홍과 온건파의 유성룡은 정여립을 탄핵한 이경중을! 탄핵한 정인홍을! 비판한 유성룡!으로 얽히어 사이가 안 좋았다. 강경파의 이발이 북악산 아래에서 살아서 북인, 온건파의 우성전이 남산 아래에 살아서 남인이 되었다.  우성전의 부친상 때 우성전이 위로 차 사연 있는 기생을 두었던 것을 이발이 비판하고 이를 정인홍이 탄핵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보면 참으로 분열이라는 것이 개인사에 얽힌 치졸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교적 사고가 생활양식과 상식 지식을 바탕이었다 하더라도 쫌 너무 사적인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든다. 둘 간의 학문적 차이가 있었다. 북인은 조식의 제자, 남인은 이황의 제자였다. 남인은 대체로 온건하고 유교적 상식을 중시하고 최대한 타협을 통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다만 저자는 임진왜란의 국란의 시기에 이러한 방법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고 있다.


선조(임진왜란)


 임진왜란 터지기 전에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다. 동인 김성일은 도요토미가 쥐 같다 하고, 서인 황윤길은 지략이 있는 인물 같다한다. 당시 동인 정국이었다. 방비 같은 건 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피난을 간다. 피난 지역은 서인 지역이었다. 서인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를 몰아낸다. 유성룡만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왔고 남인을 재상으로 기용한다.


 이순신은 동인의 지지를 받았다. 친한 동네 형! 동인인 유성룡이 그를 천거했기 때문이다. (물론 친해서만은 아니다. 이순신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논의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차후에 유성룡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이순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인 결은 이순신 지지였다) 서인은 원균을 지지했다. 조식의 제자들인 북인은 경의와 실천을 중요시했는데 이에 따라 의병장을 많이 배출했다.

 

 임진왜란 방비를 게으르게 하도록 한 동인, 원균을 지지함으로써 전쟁을 파국으로 몰 뻔한 서인.. 서로 엄청난 실책을 주고받았다.


선조(대북과 소북.. 육북과 골북, 청소북과 탁소북)


 의병장 출신을 많이 배출한 북인이 전란 말기에 실권을 장악한다. 그런데.. 여러 관직의 임명과 관련해서 대북과 소북으로 대북은 다시 이산해의 육북과 홍여순의  골북으로 분열한다. 중립적 입장인 유영경을 이 시기에 선조가 중용하는데 이 유영경이 은밀하게 영창대군을 지지한다. 당시 세자는 광해군이다. 대북은 정인홍을 불러 세자를 흔든다고 유영경을 견제하는데 선조는 정식 세자도 아닌 광해군을 두둔하다고 정인홍만 나무란다. 선조가 급작스레 서거한다. 두둥! 유영경의 소북을 탁소북, 남이공의 소북을 청소북이라고 했다.


광해군


 광해군이 즉위한다. 광해군은 대북의 지지를 받았다. 소북은 큰 일 났다? 그런데 아니다. 왜냐 소북이 왕비의 오빠이거나, 왕비의 외숙이거나 혹은 사림의 지지를 받는 청류였다. 왕의 형인 임해군은 제거된다.

 

 광해군 때 4현이 문묘에 종사된다. 이름 있는 선비이니 모시겠다는 의미이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이 그들이고 문묘종사를 칭하던 해 이황이 사망하는데 이황까지 포함하여 사림 5현이라 한다. 40년이나 걸려 사림이 유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중 이황이 들어간 것이 나중에 엄청난 논쟁이 된다.


 이황은 남인의 스승으로 조식을 스승으로 모시는 북인과는 대립관계이다.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 강한 불만을 표시한다. 이황의 인(仁)의 대표격이라면 조식은 의(義)의 대표격이었다. 본래 선조 때는 남인 집권기였기에 이 논의가 무르익을 수 있었는데 광해군 때 북인 집권 아래에서 정인홍이 강하게 이를 비판한다. 광해군의 비호로 정인홍은 무사했지만, 인조반정 이후에는 광해군 실정의 원흉으로 지목되어서 처단이 되었다.


 광해군과 대북은 서자들이 모반하려던 사건을 얽어서 선조의 장인 김제남을 제거하고 더 나아가 인목대비에 대한 모함(유릉 저주사)을 받아들여 집권 최대의 장애물인 영창대군을 폐위한다. 대북은 더 나아간다.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대비를 폐위한다. 하지만 공식적 폐서인은 만만치 않았다. 중국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이었다.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정책은 지금까지 유명하다. 명예와 유교통치이념에 따라 명과 사대는 유지하나 후금(후에 청)과도 실리적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정책이 서인과 함께한 인조반정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친명배금 정책이다.


인조 (공서와 청서, 척화파와 주화파)


 인조반정은 인조의 인척인 무관 가문 평산 신씨와 능성 구씨 그리고 이이의 문인인 이귀, 김류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김자점은 이귀와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이귀의 딸은 궁중에 들어와 임금의 총애를 받던 김개시를 포섭하고 있었다. 훈련대장 이흥립도 반정에 응했다. 모반이 미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임금은 김상궁과 유흥에 빠져있었다. 반정 대장으로 김류가 늦어 이괄이 나서려 했으나 다시금 김류가 도착해 김류가 대장이 되었다. 이 일이 차후에 이괄의 난이 도화선이 된다. 서인은  대북 정권에서 소외된 것에 대해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고 인조반정으로 이를 뒤집는다. 그와 동시에 관제야당으로서 남인과 소북 일부를 육성한다.


 앞서 말했듯 총대장까지 할 뻔한 이괄은 논공행상에서 변방의 장수로 임명받는다. 변방이 중요도를 생각한 임명이었으나 이괄은 밀렸다는 생각을 거둘 수 없었다. 이괄은 반역하고 수도까지 진입했으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관군 연합군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었다. 인조 정권의 권력적 취약성을 보여준 사건이다.


 인조 정권에서 서인은 분열한다. 반정에 참여한 서인과 그렇지 않은 서인으로 나뉜다. 공신들의 형태를 청망있는 젊은 관료들이 비판한다. 훗날 척화파가 되는 김상헌이 중요 인물인데 이들이 청서이다. 그 비판 대상은 공서이다. 인조 역시 이 공서를 견제할 목적으로 남인과 북인을 널리 기용하기 시작합니다. 공서의 실력자인 김류가 이에 적극 화답하는데 청서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였다. 김류는 소북을 중요 관직에 추천하는데 청서가 이를 비난하자 인조는 오히려 청서를 편당이라 지목하고 배격한다. 공서였던 이귀가 청서를 두둔하는데 이는 권력 이인자로서 변화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김류의 방침대로 북인과 남인의 중용되자 청서들은 타격을 받았다.


 인조 때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산림이 등장한다. 산림은 유학자 전체를 대표하는 스승으로 엄청난 명예이다. 산림은 과거를 치르지 않은 학덕이 있는 자이어 야했고, 조정으로부터 초빙을 받아야 했다. 바로 그 초빙에 응하지 않고 사양하는 척 받아야 하는 사수를 해야 했다. 산림은 조정에 나아가기는 어려워하고 물러남을 쉽게 여겨야 했다. 위인설과까지 하면서 인조는 산림을 모셨다. 김장생, 장현광, 박지계가 대표적입니다. 인조의 적통과 관련해서 아버지 정원군을 어떻게 추숭 할지와 관련해서 김장생과 박지계가 문리적으로 다투기 했다.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정묘호란 이후 청은 조선에 엄청난 세금과 조공을 요구했다. 그 이후 청나라에서는 군신관계를 요구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척화파와 전란을 위험을 신중하게 대처하자는 주화파로 갈리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발생했고 삼전도에서 항복한다. 항복을 요구하는 청나라 문서를 척화파인 김상헌이 찢는데 최명길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다면 이를 다시 붙입니다. 존명 사대는 서인의 집권 명분이었다. 척화파가 주류를 이룬다. 청나라 황제가 대청 황제 공덕비 즉 삼전비를 쓰라 하는데 임금의 명으로 이경석이 짓는다. 훗날 송시열이 이를 극렬하게 비판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 봉림대군을 세자로 임명한다. 소현세자빈 강빈 역시 옥사에 휘말려 죽게 된다.


효종 (낙당, 원당, 한당, 산당)


 효종 시기에 서인은 낙당, 원당, 한당, 산당으로 분열한다. 엄청난 분열이다. 우선 낙당과 원당은 반정을 일으킨 공신 중심의 붕당이고 과거 청서 중심의 한당 그리고 신진세력인 산당으로 나뉜다. 한당은 관료 지향적인 무리이고 산당은 수양을 중요시하는 도학 중심의 무리이다.  인조 말기에 김자점의 낙당과 원두표의 원당 이 두 세력이 치열하게 싸우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신진세력을 부르는데 이들이 산당이다. 이들은 한당과 합세하여 오히려 구세력과 대립합니다. 우선 김자점을 탄핵하고 원두표를 탄핵합니다. 인조 시기의 실권자들이 물러나게 된다. 이제 남인과 한당과 그리고 산당만이 남게 됩니다.

 

 산당은 강빈의 신원을 요구했기 때문에 효종으로서는 까다로운 붕당이었다. 특히 산당의 대표 격인 송시열은 효종과 자주 대립했다. 그런데 효종이 북벌을 목표로 하면서 송시열과 연합하게 된다. 효종은 북벌을 통해 왕권의 강화와 통치 명분을 확보하려 했고 송시열은 효종과 영합하여 임금도 유학자의 일군으로 보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사실 효종은 안보론을 바탕으로 무력 기반의 통치행위를 추구했다. 도학정치와 붕당론을 부정하며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군왕이다. 서인과 남인, 재야 사림의 지지가 철회되었는데 이를 보완했던 던 것이 송시열이었다. 신권 추구의 송시열과 왕권 추구의 효종은 상호 필요에 의해서 결합했지만 끝내 대립했다.


현종 (예송논쟁)


 효종이 죽었고 효종의 계모 그러니까 새엄마 자의대비 상복이 문제가 된다. 상복 가지고 뭐 그렇게 싸우느냐 할 텐데 효종은 소현세자의 동생 즉 둘째 아들입니다. 일반 양반가였으면 어머니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왕의 종통을 이었으면 적통이므로 장자로 보고 3년복을 입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왕을 양반 정도로 보느냐 왕으로 특별히 보느냐 하는 싸움이었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고 신권 내부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논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정국을 쥘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사건 이후로 당쟁이 유림들의 여론에 따라서 정국이 바뀌게 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송시열 주도로 서인의 1년복이 대세로 결정되었다. 서인의 한당은 현실적 입장(대동법 주장과 북벌 반대의 연장)에서 이에 반대했습니다.


  효종의 죽음 이후 현실론에 여론이 쏠렸다. 산당은 명분을 준거시 하는 준론으로 한당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완론으로 바뀌었다. 특히 청에 대한 태도에서 산당(준론)은 개인적이고 명예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청을 거부했지만 한당(완론)은 공무적 도리를 강조했다. 현종의 입장에서 한당으로 정권의 축을 옮기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확고하게 산당을 이끌던 송시열에 대해서 점차 현종도 거리를 두게 되고 서인보다는 남인을 점차 중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현종 때는 군약신강(특히 송시열)의 시대였다.


1권을 마치며


 사실 1,2권 모두를 정리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책이 너무 길다. 뭐가 중요한 지 안 중요한 지 임의로 판단할 수 없었다(뭣이 중한데!).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다 나름 재미난 사연이 있다. 역사라는 게 본래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 이루는 거 아닌가. 대체로 붕당이라는 것이 어떤 시대적, 거국적, 역사적 사명 의식을 보이며 편당이 되고 갈라지고 분열했던 건 아니라는 것이 새삼 흥미로웠다.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라는 걸 느낀다. 다만 조금씩 바뀌는 사람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어느 사이엔가 달라져있다. 애초 사대부 내부에서의 다툼이 사대부가 되지 못한 사림으로 확장되고 그 사림의 다툼이 유림으로 확장된다. 점차 정치의 참여 주체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쌓아 올린 제도는 서구적 제도이고 이러한 유교적 제도와는 별개이다. 다만 그 흔적은 우리 어딘가에 남아있지 않을까.

 2권에서는 숙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를 다룬다. 영조에 이르러서는 탕평이 시행되고 붕당은 있는 듯 없는 듯 경쟁한다. 정조 때에도 마찬가지이나 점차 세도가에 의한 정치가 대세를 이룬다. 그리고 조선은 멸망한다. 2권에서 이성무는 이 붕당의 전통이 현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살핀다. 2권도 언젠간 살피겠다. 그런데 너무 길다. 1권 요약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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