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즈음에, 내가 늘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듣는 음악은 윤종신의 '나이'다. 나이 하면 나는 두 가지 말을 떠올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와 '나이에 맞게 행동해라' 정확하게 대치되지는 않지만, 이 두 어구는 많은 부분 대립되어 연말에 나를 괴롭힌다. 두 가지 주장 모두 틀리지 않았기에 더더욱.
어떤 면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는 매년 1월 1일 해돋이를 향한 열광에 동감하지 않는다. 1월 1일에 뜬 해와 엊그제 뜬 해가 다를 리가 만무하다. 늘 그래왔듯 지구가 해를 돌고 있을 뿐인데, 아무리 상징적이라고 해도 그걸 보며 나의 염원을 담기엔 동기가 부족하다. 다른 날에 떠오른 태양에게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이도 그런 맥락에서 마찬가지였다.
스물이 되던 해, 서른이 되던 해, 그리고 앞으로 올 마흔이 되던 해에도 나는 무덤덤했고, 무덤덤할 것이다. 그래서 나이차가 많은 커플을 향한 단정적인 시선에도, 나이에 맞지 않는 옷차림이란 말에도 가끔 반항적인 마음이 울컥하고 솟아오를 때가 있다. 시간은 흐를 뿐이고 그것을 셈하여 사람이 붙인 숫자 때문에 취향이나 사랑이 변해야 한다는 점이 영 마뜩잖다.
나이 듦에 혐오감이 팽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못하는 것이 많아진다. 심지어 아무것도 못하게 직장인 사이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말은 적고 지갑을 열어야 한다'라는 말이 명언처럼 태어났다. 폭력적이다. '나잇값을 못하고 설친다.'는 비난은 얼마나 많은 늦은 용기들을 주저앉혔을까? (물론 이 말을 쓸 마땅한 경우가 워낙에 많아 나도 많이 쓰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원인은 '사람'에게 있지 '나이'에 있지 않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방어심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잘못된 프레임이 씌워지지 않았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결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두 자리의 숫자가 나를 설명할 때가 꽤 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중력은 우리를 끌어당기고 피부는 늘어지고, 등은 굽어지며 근육도 힘을 잃는다. 나는 이런 신체의 노화가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시련인 것 같다. 헬스도 처음부터 100kg짜리 추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1kg짜리 핑크 덤벨부터 시작하지 않던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하다는 뜻이라는 말이 참인 이유다. 나의 아버지는 이제 한쪽 귀가 거의 안 들리신다. 70대가 되면 아예 안 들리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하신 이유는 귀가 안 들리는 것에 다 이유가 있고, 마침 한가로운 시골로 귀농해서 이제는 가족들 말 말고는 딱히 들을 말이 없다고 하신다.
당시엔 아들의 입장으로 그딴 게 어딨냐고 화를 내었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어쩌면 근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여정을 마치고 더는 들을 말이 많이 남지 않았다. 나이듦에 대한 혐오가 조금은 줄어들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파도를 타듯 자연스러울 때가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억지로 보청기를 아버지 귀에 달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의 뜻도 있었지만, 그런 이유도 있다. 나이가 들어 육체가 바스러지는 데에는 분명, 조금 더 신중해지고 조금 더 내려놓으라는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 무렵부터 생겼다. 또 매사에 속도가 조금 늦어지고 일분, 일초를 느끼는 감각이 둔해짐으로써 세상을 좀 더 큰 그림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어쩌면 신체의 노화 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어른이 된다의 제대로 된 정의 일수도 있겠다 싶다.
아직은 나름 30대인 내가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내 앞에서 먼저 나이가 들어가는 분들을 보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훗날 아프더라도 너무 아프지 않게 나이 드는 것, 나이라는 알량한 두 자리의 숫자로 모든 걸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 육체의 유한함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