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하는 나를 위하여
서울을 떠나고 가장 많이 하는 것은 국내 여행이다. 그것도 예전같지 않게 즉흥적으로. 어떤 날은 친구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사람의 성격이 대화 주제로 떠올랐다. 여행가방을 꾸리는 스타일을 보면 대체로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 각자 자기 스타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정말 사람마다 조금씩 짐을 싸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친구는 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트렁크를 열어놓고 필요한 물건들을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챙겨 넣는다고 했다. 또 어떤 친구는 슈퍼마켓에 가듯이 품목을 메모지에 적어두고 그걸 보면서 챙긴다고 했다.
이전에는 나도 슈퍼마켓에 가듯이 하나하나 메모지에 적어두고 그걸 보면서 챙기는 사람이었다. 요즘은 돌아다니는 행동 자체에 의미를 두다보니 떠나기 전날 밤에야 허겁지겁 옷가지며 세면도구와 물 정도만 챙겨 담는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짐을 풀게 될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의외로 그렇게 대충 짐을 싸도 문제는 없었다. 심지어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 한번도 입지 않은 옷가지들이 처음 넣은 모양 그대로 꾸깃꾸깃 찌부러져 있는 모습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럴거였으면 왜 저를 들고 그 고생을 했냐며 책망하는듯하다. 참 민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참 분수에도 안 맞는 짐을 난 많이도 끌고 다니는구나 싶어 얼굴이 붉어진다.
여행 가방 꾸리기와 성격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다가, 물건 정리 습관으로 화제가 옮겨갔다. 버리느냐 못 버리느냐를 가지고도 서로의 성격이 확연히 갈렸다. 나는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것들을 끌어들여 쌓아두는 선까지는 가지 않지만, 쓸데없는 물건을 수시로 정리해 내다버리는 성격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친구들 중에 하나가 말했다. 자기도 잘 버리지는 못하는 성격인데, 왜 못 버리는지를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름 다 이유가 있더라는 것이었다. 못 버리는 이유에 대해 친구가 내놓은 나름의 분석에 다들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못 버리는 물건들은 대게 추억과 관련된 어떤 사연이 있고, 결국 못 버리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에 담긴 사연과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이건 내용물은 다 먹었지만 첫사랑이 선물해줘서 차마 못 버린 쿠키통이고, 이건 아버지가 졸업 기념으로 사준 필름카메라고, 이건 대학입시 시절 끼고 살았던 mp3 플레이어고. 그래서 사람이 소유한 물건은 딱 두 종류로 나뉜다. 실생활에 필요해서 구입한 물건, 그리고 사용시효와 그 쓸모가 이미 다했으나 사연이 담겨있는 물건. 친구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물건을 정리하려면 결국 추억과 사람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사연이 있는 물건을 내다버릴 수 있어야 비로소 필요한 물건만 남게 된다고.
친구들과 헤어져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싣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리 깨끗하지 않은 내 방과 한번도 입지 않은 가방 속 옷가지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버림'과 '놓음'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제까지 사람에게서 온 어떤 것도 버릴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물건에 대한 추억도 나에게 와서 닿았으니 그것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니 함부로 버리는 행동은 도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있었다. 도심지를 떠날 때 내가 했던 생각은 이제 이 부질없는 서울살이에 대한 집착을 '놓아'보낸다는 생각은 그렇게 잘도 했으면서, 물건에는 굳이 '버린'다는 생각을 한걸까? 그 물건이 없어진다고 추억과 그 물건과 함께했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을텐데 말이다.
놓아 보내는 것이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놓지 못하는 것은 짐이 되어 나를 고단하게 한다. 마음 정리와 방 청소가 한결 마음 편해지는 마법의 문구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