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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짬뽕 뮬란 Dec 15. 2022

위로랍시고

포기하다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숨기려고는 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나 우울증이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조금 우울해서’ 라는 식으로 돌려 말했을 뿐. 


내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위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 입 밖으로 꺼낸 말은 상대방도 듣지만 나 자신도 듣게 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은 나를 위로하려고 한다. 위로받으려고 꺼낸 말이 아님에도 나는 강제로 위로를 받는 척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이 꺼내는 위로가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로랍시고 ‘야 나도 힘들어. 다 그래’,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니가 살만하니까 그래.’ 등의 말로 나를 공격한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받아들이게 된다. ‘맞아,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 나 자신을 향한 비난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우울증은 힘들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내가 가장 힘든 사람이라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처음엔 나 자신을 의심했다. ‘내가 뭐라고 우울증이야?’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은데 왜 내가 우울증이야?’ ‘내 주제에 병이 걸리네.’ 등의 생각으로 수없이 나 자신을 때렸다. 또 누군가는 이런 말도 했다. “등 따뜻하지, 배부르지, 너 배가 불러서 우울하다는 소리를 하는거야.” 


위로랍시고 누군가는 나 자신을 평가하고 내 인생을 단정지었다. 넌 그래서 그래. 넌 이래서 이래. 나도 나 자신을 평가할 수 없고 단정지을 수 없는데 왜 너는 나를 그런 식으로만 취급하는 걸까.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나 자신이 문제였다. ‘니 말이 맞아, 난 그래.’ ‘난 그것밖에 안 돼.’, ‘내가 살만하다고 생각해서 이런 걸까.’, ‘내 탓이야.’라고 생각했다. 


인생은 원래 기쁜 일보다 서글프고 힘든 일이 더 많은 법이라 했다. 나는 서글프지 않다. 힘들지도 않다. 그러나 기쁘지도 않다. 행복하지 않다. 나는 내가 싫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고 민감해지는 내가 싫다.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지 못하는 내가 싫다. 우울한 내가 싫다. 남들의 위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울은 더 극심해졌다. ‘그래, 니말이 맞아.’ ‘너보다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그런 일로 힘들다 그래.’ ‘그래, 니말이 맞아.’ 그들은 나름 나를 다양한 방식으로 위로하는데 나는 그때마다 아팠다. 어떤 위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런 말들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위로를 필요로 하지도 않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의 이기적인 생각일테지만. 우울증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위로랍시고 쉽게 내 인생을 판단하고 단정 짓기 시작했다. “의지의 문제야.”, “왜 너만 유난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죽이고 또 죽였다. 아무렇지 않게 그들은 말하지만 나를 죽이는 일이다. 그것도 못 견뎌낸다고 나를 타박하기까지 한다.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데 힘내라는 소리만 들어야 했다.


우울증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식적인 내가 되기도 하고 진실한 내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나름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것인데 왜 나는 그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지은 결론은 이거였다.


그들은 쉽다. 난 어렵다. 나는 나 자신이 가장 어려워서 어떻게 나를 달래야 하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데 그들은 제3자이기 때문에 쉬운 것이다. 반대로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할까? 위로해주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누군가 내게 ‘우울증이 좀 있나봐.’라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 사람이 우울증이 거의 다 나았을 때 쯤 장문의 메시지를 받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봐준 내 행동이 그에게 가장 위로가 됐다고. 


나는 생각했다.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내가 과연 남들에게 어떤 말을 들어야 위로가 되는걸까. 그렇다면 나도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기만 바라고 있었던 걸까? 아무말도 하지 않기를 바랐던 걸까?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는 그저 그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로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우울증이라고 말을 꺼내기 시작한 이유도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남탓을 하는 것도 웃기다. 그들이 나를 위로할 때 그것을 받아들인 건 나였다. 그 말에 상처를 스스로 받는 것도 내 잘못이다. 그들은 위로랍시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그만해’, ‘제발 그만’, ‘거기까지만 해,’ 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 것들이 계속 쌓이기 시작했다. 나만 보면 ‘야 아직도 힘드냐 나도 힘들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은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내 조현병 증세가 더 심해지기도 하는 날은 정말 살인 충동이 일기도 했다.


위로랍시고 그들은 나를 공격한다. 위로랍시고 내 몸을 만져댄다. 그런 일을 수 년 째 겪다보니 이제는 좀 괜찮아졌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날 동정하는 듯한 말투나 위로랍시고 하는 말을 무시하게 된다. 

위로는 내가 하는 것이다. 내가 내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진짜 위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 칼 같은 혀로 누군가를 몇 번이고 죽였을지 모른다. 

단지 위로랍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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