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하다
내일의 해가 뜨지 않기를 매일 밤 기도한다. 내일이 온다는 것이 두렵다. 내일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도대체 어떤 일이 생겨날지 모르는 내일이 두렵기만 하다. 내일은 내가 살아 있을까 나에게 내일이 있을까? 내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을 늘 해보게 된다.
내일이 오지 않게 해달라는 나의 희망은 내일의 해가 뜨지 않고 영원히 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나도 내가 어렵다. 나는 어둡고 축축하고 습한 구석에 숨어 있는데 내 공간에 햇볕이 들까봐 무섭다. 그 햇볕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노출시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무섭다. 남들 눈에 띄고 싶지 않다. 그저 조용히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만 살길 바란다. 그래서일까. 외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걱정하고 어떤 모임이나 자리에 참석해야 할 때는 더욱더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참석을 웬만하면 안하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있긴 하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었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나는 인간이 아닌가보다. 사회성이 부족하고 사회생활을 잘 못해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돈은 벌어야 하니 일은 나가지만 출근하기 며칠 전부터 나는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잠을 설치곤 한다. 내일이 오면 내일 또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내 삶은 남들보다 3배 이상 느리게 가는데 그 이유는 별거 없다. 10분이 30분처럼 느껴지니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내가 학생들 앞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학생들이 나를 무시하면 어떡하지? 학생들이 내 수업을 좋지 않게 평가하면 어떡하지? 한 명이라도 학원을 나 때문에 그만두게 되면 어떡하지? 쓸데 없는 고민과 걱정으로 수업을 끝내고 나온다. 실제 그런 일도 있었다. 몇몇 학생들의 어머니가 학원에 설명회를 오셨을 때 김태이 선생님 수업이 지루하다고 하더라고요. 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내 할 일만 끝내고 나오기 때문에 학생들은 내 수업을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나는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강한 대신 유쾌하거나 재밌는 강사는 아니다. 나도 그건 나를 잘 안다. 그래서 출근하는 날이 되면 내일이 오는 것이 더욱 두려워진다. 최고조의 긴장감으로 청심환을 먹기도 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집에서 일할 수 있는 일은 없나? 집 밖으로만 안 나간다면 내일이 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생각인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
나의 기도는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내 기억으론 초등학교 때 자기 전에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작게 속삭이며 기도했다. ‘내일이 오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내일이 온다는 것이 도대체 뭐길래 난 내일을 두려워하는 걸까.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잘 없는 것 같은데도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다. 당장의 내일을 두려워하면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또 모순적이다. 나는 마흔이 되기 전 죽음을 선택할 것 같다는 생각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10대 때는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내가 죽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30대가 되니 마흔이라는 나이를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앉았다.
나는 내일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인강을 듣고 모닝페이지를 듣고 전화영어 수업을 하며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내일은 외출하는 날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안심이 된다. 안심이 되면서도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발전없는 나의 내일이 두려운걸까.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내일의 해가 뜨지 않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