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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짬뽕 뮬란 Dec 01. 2022

해결되지 못한 어린 시절의 감정

포기하다

할머니와 내가 사는 곳은 하루에 버스가 몇 대 다니지 않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온돌방이 있는 시골집이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지나가는 차들이 담장을 들이박아 마당까지 덮칠 정도로 도롯가 바로 아래 위치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때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내 곁을 떠났다. 할머니와 언니들과 살았다. 살아가는 방식에 내 선택권은 없었다. 아버지는 늘 아프셨고 어머니는 한 번씩 집에 와서 맛있는 걸 해주고 날 안아주고 언제나 그랬듯 다시 떠났다.


팔십 노인이었던 할머니는 언니들과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날 키우기에 버거워 하셨다. 어린 내가 느낄 정도로 할머니는 늘 힘들어 보였다. 팔십이 된 나이에 어린 손녀를 키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만나는 어른들마다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아 좀 봐주소.” 할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다녔는데 집을 나서기 전에 할머니는 내게 늘 당부했다. “누가 물어보면 엄마 아빠도 없다캐라.” 처음부터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우리 할머니는 늘 나를 가엾게 여겼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나를 불쌍히 여겨주길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있어 본 기억보다, 아버지가 살아 있던 기억보다 할머니와 둘이었던 기억이 더 많았다. 나는 불쌍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떻게든 내가 잘 살길 바라셨다. 어느 날 할머니는 집 가까이 살고 계신 작은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야를 고아원에라도 보내야겠나”. 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생각했다. ‘아, 할머니도 나를 버릴 준비를 하는구나.’ 할머니가 힘들구나.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왜 하필 내가 태어나서’.


나는 늘 내가 짐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짐이었던 나는 어디를 가든 가여운 사람이어야 했다. 나는 동정 받아야 했다. 할머니는 시장에 갈 때 항상 바퀴 달린 작은 수레를 끌고 다니셨다. 직접 농사 지은 농작물을 식당에 직접 가서 판매하는 방식을 선택하셨는데, 한동안은 잘 팔리지 않았던 건지 놀이동산 앞에 앉아 할머니와 나물을 팔게 되었다.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손녀 좀 보고 가소.’ 할머니는 나물을 파는 일보다 내가 먼저였다. 할머니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다 나를 위해서 그러신 거라는 걸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앉혀놓고 내가 듣는 앞에서 나를 고아원에 보내야하냐며 작은 아버지에게 몇 번을 물어보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를 위해 사셨다. 남들만큼은 아니어도 부족하지 않게 키우고 싶으셨으리라.


하지만 늘 부족했다. 먹고 사는 생활도 부모의 사랑도 모두가 부족했다. 그런 나를 가장 많이 동정한 건 늘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 손녀가 불쌍했으리라. 그래서 할머니의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누군가 나를 바라봐주길 바라셨던 것이다. 나는 단 한 순간도 할머니를 미워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자아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기억들은 나를 평생 쫓아다녔다. 나는 자신을 비하하고 비판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고 할머니마저 나를 버리려 한다는 생각이 온몸을 감싸 나의 감정까지 지배하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나 자신이 늘 짐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아있는 자체가 피해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우울증이 극심했을 때는 그 생각들이 더욱 심해졌다. 엄마의 역할을 했던 큰언니가 나를 짐으로 생각할까 큰언니의 눈치를 보기도 했었다.


중학생이 되어서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제발 어디가서 나 불쌍하다는 말 좀 하지 마세요.” 이 말을 꺼내고 그 누구보다 마음 아파한 건 역시 나였다. 그 말이 나라고 편했을까. 이불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못된 나 자신을 한탄하며.     


어린 시절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요?

정신과 의사가 물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요?” 대답 대신 눈물이 나왔다. 나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어린 아이가 또 있다고 생각하니 가여웠다. 불쌍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아줄 것 같아요.” 어떤 말을 해줘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안아주는 것을 선택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나오던 때가 있었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나는 매일 밤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나서 매일 밤 울며 잠이 들었다.


내 기억 속 처음은 초등학생이었던 때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방에 앉아 울었다. 매일을 반복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계신 산소에 가서 매일 놀다 왔다. 아버지 산소에 엎드려 해가 질때까지 울었다. 올라가는 산길에 꽃이 피면 꽃을 꺾어 아버지 산소 앞에 꽂아두기도 하고 예쁜 솔방울이 있으면 몇 개 주워다 아버지 산소 앞에 놓고 내려오는 일이 나의 하루 일과였다.


하루는 할머니에게 내가 울고 있던 걸 들켜버렸다.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와 우노”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할머니에게 소주 한 사발과 김치를 갖다 드렸다. 할머니는 내가 아버지 산소에 다녀와서 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으리라. 아버지가 계신 산소는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올라가기에는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매일을 산에 다니다 보니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산에 오르는 나를 보고 나서 작은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그 일을 이야기 했다. 위험하니 산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라고. 나는 작은 아버지에게 또 혼이 났다. “한 번만 더 올라가기만 해봐라.” 나는 무서웠다. 작은 아버지에게 혼날까봐 무서운 게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찾아가지 못하면 혼자 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걱정이 돼 무서웠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매일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절을 보낸 나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냐고 의사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더 이상 거기에 가지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최선이었다. 흙 속에 묻혀있던 아버지가 나는 살아있지 않을까 나를 부르지 않을까 꺼내달라고 소리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악몽을 매일 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새벽에 언니들과 내가 자는 방에 와서 머리맡에 앉아 불을 켜고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나는 당시에 매일 가위에 눌렸는데 아버지가 와서 머리를 쓰다듬으면 그 가위눌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얼마 뒤 세상을 떠났고 더 이상 내 가위 눌림을 막아줄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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