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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화 Mar 10. 2020

몸, 그 너머의 의미와 추상

추상미술을 보는 새로운 안목

표정과 감정, 외면과 내면을 표현한 인물, 초상, 인체를 화폭에 옮기는 것은 미술역사에서 셀 수 없이 많다. 이는 동서양을 불문하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현대로 오면서 표현의 방법은 더욱이 다양해져서 드로잉부터 설치, 그리고 퍼포먼스까지, 연구하고 정의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인체에 집착하는 이유는 시대와 환경별로 다양하다. 고대 이집트시대 부터 15세기 르네상스시기엔 ‘사실성’과 ‘유사성’을 배경으로 ‘영혼’을 담기 위해 인물을 그렸다. 화폭에 담긴 대상은 본인의 명성과 군력을 과시하기 위해, 가장 완벽한 모습을 후세에 전하려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욕망으로도 인물화를 활용했지만, 사후와 내면세계를 위한 방편으로, 특히나 이집트에서는 인체의 기능을 잘 표현함으로써 완벽한 사후세계를 갈망했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 앞을 향한 다리, 반대로 틀어진 손과 몸은 예술 그 이상의 주술적 의미를 부여 받은 것이다. 그들은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과 인체를 보고 현실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현실 너머의 공간, 내면, 개념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다양해진 이유로 인체가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제 1 오브제로서의 역할이 작아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더욱 현실을 내다볼 수 있는 직설적이지만 은유적인 메타포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귀 퐁데 (Gui Ponde) 작가는 본인의 신체를 ‘사회적 조각’으로 내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검은 스크린에 구멍을 뚫어 일부 신체 부위만을 내놓고, 손가락 끝에 사슬을 묶은 사진에 헤드셋을 끼면 “나는 (스마트폰) 스크린을 만질 수 없다”는 문구가 흘러나온다. 컵케이크로 몸을 감싼 사진은 “나는 단 것을 먹고 욕망을 채운다”는 말이 나오는 식이다. 관람객은 귀 퐁데의 몸을 보면서 몸이 아닌 일상 속의 나 자신을 떠올리고, 몸을 둘러싼 괴기스럽고, 기계적인 소리를 통해 불편한 타인의 시선과 감각까지 느끼게 된다.


귀 퐁데, 게임으로 보는 타자성-서울,  2019, 폼보드에 A0 사진 7장/ 종이에 A5 파스텔 드로잉 7장/ 오디오 7대, 디어 아마존: 인류세 2019, 일민 미술관


귀 퐁데는 비디오,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며, 역사와 언어 같은 사회적 도구들이 인간의 행동과 공존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그의 작업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 무엇보다도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출발한다.


귀 퐁데, 게임으로 보는 타자성-서울,  2019, 폼보드에 A0 사진 7장/ 종이에 A5 파스텔 드로잉 7장/ 오디오 7대, 디어 아마존: 인류세 2019, 일민 미술관


위 작품은 낯선 생물체가 아닌 인간의 신체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때 우리가 마주하는 낯선 신체는 일종의 붕괴되기 직전의 빌딩과 같은 구조물로 보이기도 하고, 다양한 생명 종들과의 상호작용이 사라진 포스트-아포칼립스 이후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립된 상황을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시리의 음성은 바라보고 있는 몸을 정의내리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며, 존재하는 것, 구상적인 것들을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취약한 것인지를 인지하게 만든다.


세상은 어떤 ‘객체’을 통해서 정의되어 지고, 형성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닌, 세상을 통해서 경험한 ‘객체’가 생겨나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작용한다. 그러나 각 객체들은 세상을 통해 축적된 경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주관적이라고 믿어지는’ 경험을 통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정의한다.


여기서 오류가 생긴다. 존 레이트먼은 모든 현상과 사물이 보다 경험주의적이고, 내재론적이며, 보다 실험적인 질문과 사유를 통해 나은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이전에 추상이 종말을 맞이했던 것처럼 현재 우리는 다시금 주관적이고, 1차원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팽창하지 못 하고 있다.


귀 퐁데는 이러한 현대의 종말적 사고를 역이용하여, 관람객이 직접 바라보고 직시하게 만든다. 몸 자체를바라보고,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보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사고하게 만들고, 봄으로써 낯선 새로운 가상의 기회를 허용하게 한다. 몸이라는 집약체를 사용하여 낯선 다른 가능성들로 이뤄진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가상성으로 관람객을 인도한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몸 자체의 원형을 자신만의 시선과 감각으로 다른 의미와 결과를 창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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