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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증후군

by 요우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 연휴가 지나갔다. 추석이나 설 연휴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여겨지지만, 나에게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 년에 몇 안 되는 시기로 생각한다.


명절 즈음이 되면 멘탈적으로 좀 취약한 상태가 된다. 나는 이걸 나에게만 한정되는 명절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언젠가부터 그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향에 내려가는 횟수가 줄어들고, 고향에 내려가더라도 머무르는 시간이 짧아지며 명절 내내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랬던 걸까.


올해 추석 연휴를 시작하자마자 좋아하는 회사 형과 떠난 글램핑


좀 더 어렸을 때의 명절이란,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과 며칠 동안 계속 만나며 떠들며 놀던 시기였다. 그러나 나이가 좀 더 들고, 친구들이 결혼을 하거나 다른 책임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들을 연속적으로 만나기는 어려워졌다. 만 18세 겨울에 종로5가 낡은 고시원으로 상경하며 독립했으니, 벌써 올라와 산지가 거의 고향에서 살았던 기간만큼이다. 이제는 고향에 내가 머물 공간도 없어서 고향에 내려가더라도, "돌아왔다"는 느낌보다는 이방인으로서 "방문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향에는 물론 여러 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나는 가족에 대한 결속력이 비교적 약한 편이다.)


올해는 다른 때의 명절보다 더욱 취약했다. 얼마 전 마지막으로 남아계시던 외할머니가 떠나시어 큰 상실감을 겪었고, 추석 직전에 편도선 절제 수술을 받고 집에서 혼자 2주간 끙끙 앓았다. 그리고 수술 전후로 멘탈을 터트리는 대단한 사건으로 그 어느 때 보다도 분노했다. 하필 회사는 회사대로 업무가 타이트한 상태다. 내 사정 때문에 다같이 하는 일에 지장을 주는 것도 참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수술로 인한 병가를 아쉬운대로 며칠 반납하고, 조기 복귀하여 업무를 쳐냈다.


ChatGPT 를 쓸데없는 곳에 사용하기


몸은 정신의 영향을 받고, 정신도 몸의 영향을 받는다고 믿는다. 평소의 명절과는 다르게 몸도, 정신도 데미지가 커서 얌전한 회복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 다 나아지고는 있지만, 평소에 쉬는 것을 어색해하는 나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최대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미뤄뒀던 생각을 꺼내고, 적당히 정리하고, 한동안 멈춰있던 질문들을 되새긴다.


불멍 불멍 불멍 그리고 또 불멍


취약해져 있는 상태에서는 이런저런 작은 실수를 한다. 지난 몇 년간을 돌이켜보면서 발견한 내 모습이다. 혼자 얌전히 사색하면 되는데, 이 시기에 누군가를 만나면 꼭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 대부분 인간관계나 말과 관련된 실수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감정이 넘치고, 감정기복이 심해진 상태에선 불필요한 사건을 만든다. 올해도 분명 뭔가 실수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무언가 실수한 게 있다면 죄송. 명절만 되면 취약해진 내가 분위기 못 읽고 벌인 귀여운 실수로 봐주길. 나이가 들어도 사람은 참 잘 안 바뀐다.


10년도 전에 읽었던 정신분석 책을 다시 한번 꺼내 들어 읽어보고 있다. 꼬질꼬질. 옆에는 위스키가 아니라 히비스커스다.


아무튼 올해 추석 연휴는 대부분 집에서 보냈다. 책을 읽거나, 동네에 운동을 나가고, 누군가를 만나 가볍게 떠들면서 술 한잔 하거나, 집을 정리하고, 먹고 싶은 요리를 해 먹으며 그렇게 흘려보냈다. 고향을 다녀오지도, 무언가 기억에 남는 일을 벌이지도 않았지만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정신 차려보니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이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뭔가를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거나 당장 내일부터 미뤄둔 일들을 다시 마주할 생각 하면 스트레스가 스멀스멀 올라오지, 모두 의미 없는 생각이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생각을 멈추고, 늘어져만 있어야 하는 날들도 필요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해 본다.


명절에는 역시 전이지. 직접 만든 파전에 공보가주 고량주 3잔


벌써 10월의 중순이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고 느끼는 2025년도 벌써 막바지다. 내가 올해 역시 잘 마무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제보다 내일이 좀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2025년 10월 9일에 24시 카페에 앉아 초안을 작성하다.
2025년 10월 12일, 연휴의 마지막 날 밤에 발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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