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in 1993.07.15
열두 살 가을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가 장을 봐오면서 달걀 한 판을 사 왔다. 그러면서 이 달걀이 ‘유정란’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유정란이 무엇인고 하니, 품으면 병아리가 될 수도 있는 달걀이라고 했다. 병아리가 태어날 수도 있는 달걀이라니!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달걀 한 개를 내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보일러를 켰다. 가장 따뜻한 방 한쪽 구석에 낡은 스웨터로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 앞에 스탠드도 가져다 놓았다(어디서 본 건 많은 아이였다). 그리고 시간마다 스웨터를 들춰보았다. 결국 병아리는 부화하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그 유정란 한 알로 설렜던 기억이 난다.
재수생이었던 스무 살에는 참 바빴다.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학원에 있는 지난한 생활을 했다. 그 당시 내게 주어진 자유 시간은 매일 학원에서 돌아오는 한 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아파트 근처 나만의 아지트로 향했다. 그곳은 아파트 한쪽 구석의 빈 공터로 앞이 탁 트여있어, 제법 호젓한 느낌이 나는 장소였다. 그곳에 앉아 나는 의식을 치르듯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폰을 꽂고, 정말이지 신중하게, 그날의 노래를 선곡했다. 그리고 음악에 취해, 감성적인 기분에 취해, 수능이 끝난 나의 대학생활을 상상하며 백일몽에 빠지고는 했다. 그때 들었던 노래들이 얼마나 가슴을 울렸었는지, 백일몽이 나를 설레게 했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 아침 나는 유정란을 삶았다. 아침에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정란을 따뜻한 물에 담가 두면 어떻게 될까?’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산책을 했다. 거의 매일 하는 산책이지만, 어디 잠시 앉아 노래를 들으며 감상에 젖는 일은 거의 없다. 매일 최소한의 운동을 해야 하니까, 오늘 회사에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정리해야 하니까 걷는다. 서른을 코앞에 둔 나는 쓸모없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영화 한 편을 고르면서도, 이 영화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를 고민한다. 그렇게 매일 쓸모를 고민하다 보니, 조금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됐다. 스물아홉의 나는 스물의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더는 감상에 젖을 일이 없고, 맘 편히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지 못한다(않는다). 세상 일에 무덤덤한 사람이 됐으니까. 웬만한 일에는 설레지 않는 양철 서른이 될 준비를 마쳤으니까.
양철 서른은 웬만해서는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아주 가끔 한 번씩, 문득 자신의 이십 대가 끝났다는 걸 자각하고, 서글픈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지만, 그것도 잠시다. 감상에 빠지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양철서른의 순기능은 무덤덤함이다. 스무 살의 그는 아마 서른이 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겠지만, 양철서른은 ‘서른이 되면, 해가 두 개가 뜬다더냐’하는 한 마디 정도로 덤덤하게 넘겨낼 수 있다. 하지만, 그도 가끔 쓸모없는 일, 의미 없지만 설레게 하는 일에 생각 없이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한때는 그도 감수성이 풍부했던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따금 한 번씩 소년 시절의 추억을 반추하는 일이, 자신을 미소 짓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도 그의 목표는 ‘쓸모가 1 도 없지만 즐거운 일 세 가지 하기’이다.
30±1,
[양철서른]
written by WOODY HWANG
@woody_93
황운성, born in 1993/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