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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수 Dec 12. 2021

빠른 년생 -곽수연

Born in 1994.01.18


나는 27.9~29.9세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서른이다.


1월 생인 나는 이른바 '빠른 년생'이다. 이름도, 주민등록번호도, 심지어 성별까지도 정정이 되는 요즘 시대에 생일만큼은 변경이 안 돼서, 하는 수없이 빠른 이라는 애증의 꼬리표를 달고 산다.


조금 일찍 학교에 들어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고충이 있었다. 20살이 되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혈중 알코올 농도를 늘 적당히 유지하며 살 때, 나도 내 혈관에 술이 흐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호기롭게 찾아간 술집에서 번번이 입장을 거절당하면서 알코올 대신 미안한 마음이 흘렀다.


게다가 빠른 년생들은 학창 시절 생일파티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다. 겨울방학이라 등교도 안 하는 데다, 새 학년을 맞아 반까지 바뀌다 보니, 교실에서 케이크를 나눠 먹는다던가 하는 소소한 파티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화려한 생일을 보내고 싶었는데, 연초부터 연차를 쓰기 민망해서 사무실을 지키는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빠른이 별로라는 건 아니다. 전날 싸운 남자 친구를 내가 욕해도 남이 욕하는 건 못 보는 것처럼. 빠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농담처럼 투덜대긴 하지만, 사실은 좋아하는 마음이 꽤 크다.



빠른 끼리는 '느린' 친구들은 모르는 우리만의 끈끈한 유대 관계가 있다. 학연, 지연처럼 "저도 빠른 이에요!"라는 말 한마디에 '야 너도?' 하는 표정으로 하이파이브를 한다.


느린 친구들은 해보지 않을 고민도 많이 해보았다. 빨리 태어난 것만큼이나 철도 빨리 들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한 달 먼저 태어난 사람에게 언니,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3월 생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넓은 포용력을 지녔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입학 제도, 국가별로 친구를 구분하는 기준, 유교 사상에 따른 서열 제도 등을 심도 있게 고민한 덕분에 빠른 제도에 대해서는 논문을 쓸 수도 있을 만큼 그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상당히 양심적이다. 실제로 나는 대학교 새내기 때 법적으로는 청소년 요금을 낼 수 있었는데, 캠퍼스 앞에서 버스를 탈 때마다 "청소년입니다" 소리에 집중되는 이목이 부담스러워서 굳이 성인 요금을 내고 타곤 했다. 통장 잔고는 비었지만 마음에 자부심만큼은 차올랐다.


몇 년 생이냐고 물어도 학번으로 은근슬쩍 대답할 줄 아는 능수능란한 면모와, "나도 동갑이야"라며 묻어갈 수 있는 뻔뻔함도 있다. 불리할 때면 "내가 제일 어리잖아" 하며 되지도 않는 변명을 던져볼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우리는 모두 친구'를 외치는 포켓몬스터처럼 위아래와 모두 친구를 맺을 수도 있다.


심지어 성격도 좋다. 나의 경우에는 책임감이 굉장히 강한 편인데, 족보를 꼬지 않기 위해 어려서부터 노력해 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또한, 매우 긍정적인편인데, 연말연시가 되면 다들 한 살 더 먹는다며 슬퍼할 때, 곧 다가올 생일을 기대하며 기뻐했던 습관 때문인 것 같다.



2033년, 마흔한 살이 되어서도 '만으로는 아직 30대'라며 우겨볼 수 있을까? 빠른 년생 제도가 사라진 세상에서 존재 자체로 증거가 되어버린 마당에, 훗날 새내기들에게 "나 때는 말이야 빠른 이라는 게 있었어~" 하며 술집에 몰래 들어가려고 화장실에 숨어 타이밍을 노리던 20살의 내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서른. 다가올 우리의 인생에 힘겨운 일들이 많겠지만, 그 안에서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싶다. 반짝거릴 노년을 기대하며,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청춘을 살아 보려 한다.



30±1,

[빠른 년생]

written by KWAK SOOYEON

@kwak_sy

born in 199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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