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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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0월24일
영국의 첫인상은 그간 내가 지녀온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낡은 벽돌 건물 위로 묵직하게 드리운 회색빛 구름, 코트의 깃을 세운 남자들이 미간에 작은 주름을 만든 채 무신경하게 거리를 걷는 곳. 사실 이러한 일련의 이미지들은 모두 영국 드라마 '셜록'에서 온 것들이다. 매력적인 배우 배네딕트 컴버비치와 마틴 프리먼. 드라마 속 셜록과 왓슨은 항상 쌀쌀하고 습습하고 우중충한 런던을 거닐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런던의 우울함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쏙 드는 런던의 매력을 또 하나 꼽으라면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뮤지컬이라고 말할 것이다. 매일 밤 런던 도심 한켠, 웨스트엔드 거리에 어둠이 내리고 화려한 네온 간판에 불이 들어오면 세계적인 뮤지컬들이 무대 위에 올려졌다. 우울한 날씨와 뮤지컬이라니.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찰떡 아이스의 떡과 아이스크림처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물가가 비싼 런던에서 뮤지컬을 제 값에 봐야 했다면 아마 지레 겁을 먹고 관람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는 우리 같은 알뜰 여행자들을 위한 혜자 같은 시스템이 존재했다. 웨스트엔드 중심부에 위치한 tkts에서 매일 당일 공연표를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것. 세상 스윗한 꿀팁을 얻은 우리는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나왔다. 티켓박스 오픈 시간인 10시 언저리쯤 도착해보니 대략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 티켓 박스 앞 전광판에 떠 있는 오늘의 할인 정보를 꼼꼼히 살핀 뒤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을 보기로 결정했다. 좌석은 구역별로 가격이 달랐는데, 남편 생의 첫 뮤지컬이니 살짝 투자하여 중간 등급의 티켓을 구매하기로 했다. 가격은 한 사람당 43파운드(약 6만 3천 원). 뮤지컬 본고장에서 오리지널 공연을 6만 원 주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티켓 발급해주는 직원이 자리도 잘 골라주어 초특급 좋은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영국 런던 TKTS 정보
운영시간: 월요일~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위치: https://goo.gl/maps/siHRsGzmPny
기분 좋게 예매를 마치고 영국에 놀러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른다는 '영국 박물관 British Museum'을 찾았다. 입장료는 무료. 이 안에 전시된 물건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시절 다른 나라에서 훔쳐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훔쳐 왔길래 영국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걸고도 입장료를 받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증에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박물관 만랩이 된 탓인지 처음에는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놀라운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우선은 서태지 뮤직비디오에서나 보았던 모아이 석상. 이 석상의 고향은 칠레 이스터섬이라는 곳인데 영국에서 24시간 내내 비행기를 타고 가도 도착하지 못할 만큼 멀리에 있다. 그곳에 가면 해변을 따라 수백 개의 모아이 석상들이 줄지어 서있는데, 그중 그나마 가지고 오기 편한 사이즈를 고른 것 같았다. 그래도 이것도 커. 남의 나라에 잘 있는걸 왜 이렇게 파가지고 들고 오는지 이해가 안 간다. 전리품이었으려니 생각하니 더 열 받는다.
다음은 로제타석. 세계사 시간에 열심히 외웠지만 당최 왜 외웠는지는 기억이 안 나서 네이버 백과사전을 검색해보니 이집트 상형문자의 비밀을 밝힌 중요한 열쇠라는 해설이 나왔다. 우와. 이렇게 엄청난 게 왜 여기 있는 것이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니 나폴레옹이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 그의 부하가 나일강 하구의 로제타라는 마을에서 이 비석을 발견했는데 프랑스가 영국에게 전쟁에 패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넘겨주게 되었다는 것.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영국군이 로제타석을 실어가던 날 거리에 모두 나와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게다가 아직까지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더 고구마.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게 끝판 왕이었다. 그리스 페르테논 신전 통째로 떼어다 전시하기. 가져올 수 있는 건 싹 다 가지고 와서 착착 붙여 신전을 재현 해 두었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많이 가져다 놨다.
기둥도 떼 오고 조각도 나노 단위로 실어 온 듯. 물론 복원도 잘 되어 있고 따듯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화려 했던 과거 그리스의 유적들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문득 이걸 다 떼 오고 난 뒤 신전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어 검색을 해보니 기둥만 남은 페르테논 신전의 사진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그리스 정부는 1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유물 반환 요구를 해오고 있는 데다 최근에 페르테논 신전 근처에 새롭게 박물관도 세웠다고 한다. 나중에 유물을 반환받게 되면 그곳에 전시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 이 대목에서 정말 맴찢.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전시품 반출 금지 법을 들먹이며 끈질기게 거부권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 박물관 구경을 하면 할수록 영국이 미워졌다.
문화를 빼앗겼던 경험이 있는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왠지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씩씩대며 박물관을 나온 것도 잠시, 눈 앞에 나타난 셜록 동상에 홀랑 설레버리고 마는 나란 사람. 미리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셜록의 집이자 탐정 사무소인 베이커가 221B호가 있다. 나는 몸무게가 갑자기 반으로 줄어드는 듯한 가벼움을 느꼈다. 그만큼 발걸음도 빨라졌다.
있다. 정말 있어. 셜록이 밤낮없이 드나들던 베이커가 221B호.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옆을 스쳐 지나며 나는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문 앞을 지키는 귀여운 미소의 아저씨와 눈이 마주친 순간 덕후의 마음에 그린 라이트가 켜졌다. 하지만... 하지만... 1인당 15파운드(약 22,000원)나 하는 사악한 입장료. 너무너무 아쉬웠지만 이미 뮤지컬을 보려고 큰 투자를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삥 하고 켜진 그린 라이트를 묵묵히 끌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 달래려고 셜록 홈즈 관련 굿즈를 살 수 있는 가게에는 들어갔다. 셜록이 무심한 듯 시크하게 물고 다니던 파이프며 시그니처인 모자까지 아주 돈을 벌려고 작정을 한 듯한 디스플레이. 예쁜 쓰레기들 천지인 이곳에서 나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가방을 움켜 줬다. 심장아 나대지 마라. 지갑에 손대지 마!
꼼꼼히 가게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는데 남편이 셜록의 시그니처 탐정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붉은 나무 진열대와 클래식한 조명 아래 서있는 남편을 보니 구한말 독립 운동가의 모습이 언뜻 스쳐갔다. 같은 모자 다른 느낌의 좋은 예가 아닐 수 없었다.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예쁜 쓰레기들의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샵을 나와 편의점으로 갔다. 아점으로 런던에 사는 친척 언니들이 바리바리 싸준 밥과 반찬을 먹었더니 꽤 오랜 시간 든든함이 유지되어 저녁은 간단하게 편의점 식으로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샌드위치, 샐러드, 팬케이크빵를 하나씩 집으니 3.9파운드(약 5,800원)가 나왔다. 뭐지. 가성비 쩌는데?
이렇게 준비된 저녁 식사를 들고 버스에 올라 도시 외곽에 있는 '프림로즈 힐 Primrose Hill'로 갔다. 언덕에 서니 런던의 시티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화창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우중충한 구름 낀 도시의 얼굴도 그 나름으로 멋있었다. 공원에는 우리 말고도 여유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초겨울 같은 쌀쌀함에 다들 털모자에 목도리까지 중무장을 하고 나왔다. 날씨는 추웠지만 공원에서 저녁을 먹는 낭만을 시전 하려고 벤치에 앉아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꺼냈다. 배가 고파서 맛있었다. 추워서 더 그랬다. 영국의 칙칙하지만 멋들어진 공원 풍경을 감상하며 포크 하나로 너 한입 나 한입 나눠 먹는 5,800원짜리 저녁 식사. 이곳에 낭만이 있다.
거리 곳곳에 어둠이 내려앉고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웨스트엔드로 향했다. 10월인데 벌써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이었다. 괜시리 마음이 설렜다. 산타클로스를 믿지 못할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산타가 나오는 영화가 좋다. 그래서 핀란드에 있는 산타마을에도 꼭 가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진짜 요정들이 선물을 포장하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엄청난 물가로 인해 여행 루트에서 제외되어 버린 북유럽.... 안녕. 언젠간 내가 꼭 너의 곁에 갈게. 산타마을.
웨스트엔드의 화려한 네온 조명들은 극장으로 향하는 관람객들의 마음에 기대를 불어넣었다. 나도 아침에 부지런 떨어 예매한 '오페라의 유령'이 상영될 'Her Majesty's Theatre' 앞에 도착하니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10월, 이 극장에서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올려졌다. 딱 이 정도의 온기가 머물던 31년 전 10월의 어느 날 말이다. 안내를 위해 마련된 로비에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정말 깡패 수준이었다. 중후한 나무 장식의 인테리어에 여기저기 붙어 있는 가면 이미지까지,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자리도 너무나도 완벽 그 자체! 우리가 받은 자리는 Stalls(1층) 등급의 K24, 25번이었는데, 무대에서 아홉 번째 줄이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좌석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안내 방송이 나온 뒤 불이 모두 꺼졌다. 관객들의 소란이 차츰 잦아들고 몇 초간 적막이 감돌았다. 그리고 첫 조명이 무대 위에 비치던 순간, 나는 순식간에 극의 배경이 된 1861년 파리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와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완성된 명곡들이 귀를 통해 심장으로 거침없이 흘러들었다. 우리는 막을 겨를도 없이 연속으로 밀려드는 감동의 물결에 흠뻑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멋진 밤이었다. 남편은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도 한참 동안이나 행복한 몽상가 마냥 중얼거렸다.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면서 말이다. 이렇게 뮤지컬을 통해 런던의 진정한 매력에 제대로 빠져버린 우리 두 사람은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저렴하게 득템 한 티켓을 들고 웨스트엔드를 걸었다. 어둠이 내린 밤거리 위로 화려하게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따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간과 장소로, 짧지만 긴 또 다른 여행에 오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