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위로 비가 내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지던 런던의 가을. 여러 겹 겹쳐 입은 외투 사이로 찬 바람이 은근하게 드는 것도, 자박하게 밟히는 비 발자국 소리도 이곳에서는 낭만이 된다.
오늘의 여행은 트립어드바이저를 통해 미리 예약한 영국 역사 기행이다. 9시까지 'Tower Hill Station 타워힐역' 앞에서 가이드를 만나야 했기 때문에 비 오는 가을 아침을 즐길 틈도 없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환승을 해야 한다는 구글맵의 설명을 따라 열심히 갈아탔는데, 웬걸 열차가 다리를 건너 이상한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우리가 탄 것은 특급 통근 열차 같은 것이어서 일반 지하철보다 요금이 훨씬 비쌌다. 더 문제인 것은 잘못 탔던 그 역으로 다시 되돌아 가려면 이 비싼 지하철을 한 번 더 타야 한다는 사실. 결국 우리는 잘못 탄 지하철 한 정거장 왕복의 대가로 1인당 2만 원에 가까운 돈을 지출하게 되었다. 하루 식비 7파운드 밖에 안 썼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진짜 대박 속상.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행히도 가이드님은 15분이나 늦어버린 우릴 버리지 않으셨고 그 덕에 가까스로 무리에 합류할 수 있었다. 도착과 동시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상 앞에서 시작된 역사 이야기.
영국이 세워진 이 땅은 기원전 4세기경 켈트족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55년 로마 제국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략으로 영국 남쪽은 로마에 속하게 된다. 그는 템즈강 주변에 요새를 만들고, '론디니움 Londinium'이라는 작은 마을을 세웠는데 이 이름이 바로 '런던 London'의 어원이 된 것이다.
<오래된 성벽들의 흔적>
잉글랜드는 BC 4세기경까지 이렇게 로마제국의 일부로 살아간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자 북쪽에서 척박한 유목 생활을 이어가던 게르만족은 따뜻하고 먹을 것 풍부한 잉글랜드로 슬금슬금 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 흘러 들어온 게르만족의 일부가 바로 앵글로족과 색슨족이다. 유전적으로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던 게르만족 사람들은 무지막지하게 잉글랜드 즉 영국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로마인과 함께 살아가던 켈트족은 그 등살에 떠밀려 지금의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등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판 대하사극 왕좌의 게임/ 출처: winteriscomming.net
이렇게 잉글랜드에 자리를 잡게 된 앵글로족과 색슨족은 잉글랜드, 켄트, 서식스, 웨섹스, 머시아, 이스트 앵글리아, 에식스 노섬브리아라는 일곱 개의 왕국을 건설한 뒤 서로 투닥거리며 살아간다. 가이드님께 이 설명을 들으니 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내용인데 싶었다. 오호 왕좌의 게임! 드라마에서도 성향이 너무나도 다른 7개의 부족 국가가 맨날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아가는데, 현실도 딱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 적 때문에 단합하게 된다는 설정도 똑같다. 왕좌의 게임에서는 모두의 적으로 좀비 같은 '화이트 워커'가 등장하고 현실에는 자비 없는 '바이킹'들이 등장한다.
<존스노우와 대너리스 그리고 에그버트왕 / 출처 좌: 패드앤팝콘 우: britroyals.com>
안으로는 7개 왕국이 서로 잘났다고 난리고 밖에서는 자꾸만 바이킹이 침략을 해오는 상황. 왕좌의 게임에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용 엄마 대너리스와 존스노우가 나타나 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버린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바로 웨섹스 왕국의 에그버트 왕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침략해오는 바이킹을 막아내고 제 각각인 7개의 왕국을 통일해 잉글랜드 최초의 통일 왕국을 세운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상황인데 그걸 또 해내는 사람이 있다니.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딱 맞다. 하지만 이 뒤에도 바이킹과 앵글로-색슨족의 뺏고 뺏기는 갈등이 계속되다가 결국 바이킹 중 한 부족이었던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차지하며 상황이 일단락된다.
<노르만 왕가의 문양. 약간 무섭다. / 출처:wikimedia>
노르만 왕조는 바이킹의 여러 부족 중에 하나인 노르만족에 의해 세워진 왕조다. 근데 노르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노르만.. 노르망.. 노르망..디.. 노르망디?
조금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하자면 대략 10세기 초, 프랑스에 도착한 덴마크계 노르만족이 프랑스 국왕에게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하고 노르망디에 자리를 잡고 살아간다. 그들은 노르망디 공국을 세우고 100년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에서 잘 살다가 1066년 윌리엄 1세를 필두로 잉글랜드를 점령하게 된다. 윌리엄 1세는 당당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까지 치르고 잉글랜드의 공식적인 노르만 시대를 연다.
<정복자 윌리엄 1세는 영어를 못했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자, 노르만족에게 넘어간 잉글랜드는 이제 어떻게 될까? 잉글랜드의 새 주인이 된 노르만족은 100년 넘게 대대로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쓰며 살아온 노르망디의 귀족들에게 나라의 모든 권력을 넘겨준다. 그로 인해 왕실과 귀족은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를 쓰게 되었고, 평민과 농민은 영어를 쓰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는 왕족의 언어라 고귀하고 영어는 천박한 언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과 프랑스는 약간 국민 정서가 안 맞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너무 얽혀서 그런 것 같다. 지금의 영어인 잉글리시가 원래 잉글랜드에서 기원한 것인데, 그런 나라를 한때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배했다니. 정말 복잡하고 흥미진진하다.
<윌리엄이 자기 자랑하려고 만든 런던 타워>
윌리엄 1세. 그는 자신의 위엄을 자랑하기 위해 런던시 동쪽 끝에 웅장한 탑을 세우는데 그게 바로 런던 타워이다. 이런저런 역사를 들으며 도착한 런던 타워는 구름이 잔뜩 낀 날씨와 어우러져 흥미로운 옛날이야기를 마구 풀어낼 것만 같아 보였다. 지어질 당시 최초의 석조 성채였던 런던 타워. 그 전에는 나무로 지은 성채만 있었는데 햇볕에 반짝이는 석조 건물이 세워졌으니 얼마나 멋지고 위엄 있었을까. 하지만 이곳은 방어용 성체이자 감옥 및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어 당시 사람들 눈에는 조금 음침하고 무서워 보였을 것이다.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이곳에 오면 경비대를 만날 수 있다>
런던 타워에는 이곳을 지키는 '요먼 Yeomen'이라 불리는 경비대가 있다. 요먼 경비대는 '비피터 Beefeater'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Beef + Eater'의 합성어이다. 당시 고기를 월급으로 주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여왕의 고기를 지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설 두 가지가 유력한 것 같다. 경비대는 튜더 왕조 시대에 창단되어 지금까지 쭉 이곳을 지켜왔고 이곳이 관광지가 되면서부터는 가이드의 역할까지도 수행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경비대, 심상치가 않다. 선발이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현역 군인으로 22년간 복무 하기'이다. 그만큼 선발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바늘구멍 같은 기준들을 모두 통과해 경비대원으로 선정이 되면 가족과 함께 이 런던 타워 안에 있는 거주 지역에서 복무가 끝날 때까지 살아야 한다. 거주 지역에는 펍도 있고 기본적인 생활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만, 제공되는 집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고 한다. 몇백 년 동안 여기저기 고쳐가며 살아가는 공간이니 시설의 쾌적함보다는 이곳의 일원이 되었다는 영광을 자랑스러워하며 지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아라 카메론이 커피를 사고 있다. 신기해!>
요먼 경비대는 100% 남자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는데, 모이라 카메론(Moira Cameron)이라는 예비역 육군 준위가 2007년에 경비대로 선발이 되며 최초의 여성 요먼 경비병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진짜 모이라 카메론이 나타나 내 앞을 지나갔다. 대박. 가이드님은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진짜 운이 좋은 날이라고 말했다.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이런 우연은 언제나 대환영이다.
<영어책 표지에서 본 것 같은 타워 브릿지>
최초의 여성 요먼 경비병을 만난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우리의 눈 앞에 타워 브릿지가 나타났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 같이 예쁘게 지어진 타워 브릿지는 선박이 지나갈 때 다리가 열리는 개폐식 다리이다. 처음 이 다리를 만들고 1894년 6월 30일에 개통식을 했는데, 템즈강을 가득 메울 만큼 수많은 배들이 모여 이날을 축하하는 의미로 다 함께 경적을 울려댔다고 한다. 완전 열광의 도가니였나보다.
<타워브릿지 개통하던 날 / 출처: commons.wikimedia.org>
우리는 무시무시한 감옥으로 이어지던 '반역자의 문 Traitor’s Gate'을 지나 타워 브릿지 위에도 올라갔다. 나는 다리 위에 서서 누런 템즈강을 내려다 보았다. 강들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인간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본다. 조용한 템즈강도 지금껏 어마어마한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았겠지. 우리의 한강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타워브릿지 걸어보기>
<런던의 모든 것을 지켜봐 온 템즈강>
다음 코스는 영국 왕립 천문대 그리니치! 바다를 통해 세계로 영향력을 펼쳐 나가던 대항해 시대, 유럽 사람들은 신대륙과 새로운 문화 그리고 새로운 물자들을 누구보다 먼저 차지하기 위해 천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로 더 빠르게 더 안전하게 도달하기 원했고 그 갈망의 크기만큼이나 지식은 빠르게 진화해 갔다. 천문의 발전은 그렇게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의 침략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지구의 중심선을 만나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라를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각자 지도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지도로 항해를 하다 보니 기준이 제각각이라 혼란이 가중되었고 각 나라의 정확한 위치 파악도 어려웠다. 그래서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기준이 될 자오선을 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 본초자오선이다. 본초자오선을 보는데 뜬금없이 중고등학교때 체육선생님이 떠올랐다. 키가 작아 늘 1번인 나에게 체육시간마다 늘 '기준'을 시켰던 선생님. 잘 계시는지 모르겠다.
<세계 시간의 기준이 되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계>
시간의 개념도 지구의 자전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본초자오선을 00시 00분 00초의 기준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그리니치 천문대 문 앞에는 세계 모든 시간의 기준이 되는 시계가 걸려 있다. 온김에 손목 시계 시간도 맞추고 아주 유용한 시간이었다.
<다양한 뱃머리 장식들>
해양박물관 안에서는 두 가지가 인상 깊었는데 하나는 뱃머리 장식들이다. 과거에는 돛과 바람을 이용해 출력을 얻는 범선이 많았기 때문에 순항을 위해 미신적인 성격으로 뱃머리에 장식을 달곤 했다고 한다. 더불어 배의 위풍당당함을 뽐내거나 적을 위협하려는 목적도 지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장식들이 영웅, 왕, 아름다운 여인, 동물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크기가 클수록 뭔가 더 근엄하고 무서워 보이는 느낌.
<고대 천문 관측도구 아스트롤라베스>
그다음으로 신기했던 것은 고대 천문 관측 도구였던 '아스트롤라베스 Astrolabes' 이다. 아스트롤라베스는 나침반처럼 생겼는데 이 도구로 시간은 물론 별의 움직임, 지리적 위치 및 각도까지 측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 만들어진 것은 BC150년 쯤 그리스에서였는데,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이것을 발전시켜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정확한 방향을 찾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발전된 아스트롤라베스는 다시 스페인계 이슬람 사람들을 통해 서부 유럽으로 들어와 널리 쓰이게 된다. 이 신박한 천문 관측 도구는 항해 시 위도를 확인할 때에도 유용했던 것 같다. 비록 많이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는 정확도가 급격히 떨어진다고 쓰여 있지만 말이다.
<영국은 흐린날도 멋지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부슬부슬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이 없어 두르고 온 머플러를 머리까지 덮어쓰고 그리니치 천문대 공원을 걸었다. 가을과 우중충한 날씨와 드넓은 정원이 만나 오묘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오만과 편견이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작품 속에 등장할 법한 풍경이었다. 감성적인 분위기들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차갑고 습한 공기 때문에 몸이 축축 처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의 일정 중 겨우 반 밖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 공부는 역시 힘들다.
<커티샥 호 / 출처:en.wikipedia.org >
도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티 페리를 타러 가는 길, 강 옆에 전시된 배 한 척을 보게 되었다. 이 배의 이름은 '커티샥 Cutty-sark'. 1791년 로버트 번즈가 쓴 시에 마녀가 등장하는데 그 마녀의 별명이 바로 '커티샥 Cutty-sark'이다. 뱃머리에는 가슴이 드러나는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머리카락 같은 것을 움켜쥐고 있는 조각상이 붙어있다. 날씨가 어둑어둑하니 뭔가 좀 섬뜩해 보이기까지 했다.
<머리채 잡은거 아니고 말 꼬리털>
뱃머리 조각상이 움켜쥐고 있는것은 사실 머리카락이 아닌 말꼬리이다. 얽혀있는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마녀 커티샥이 속옷 차림으로 춤을 추고 있는데, 탐 오 섀터라는 남자가 그것을 훔쳐보다가 들키게 된다. 커티샥은 도망가는 탐을 뒤쫓았고 탈출의 마지막 순간 탐이 타고 가던 말의 꼬리를 낚아챘다는 것. 아마도 커티샥호가 중국에서 차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배들을 따라잡아 제일 먼저 차를 실어 오라는 의미에서 이런 조각을 장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웨스터민스터 사원>
페리를 타고 도심으로 건너와 세인트폴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짧게 둘러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의 역대 왕과 여왕의 즉위식이 치러지는 공간인 동시에 그들이 숨을 거둔 뒤 묻히는 무덤이다. 영국 내에서 정치적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장소이기에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되었다. 지금도 영국 왕실의 중요한 행사들은 모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다고 한다. 2011년 배우 케이트 미들턴과 윌리엄 왕자가 결혼할 때 뉴스에서 이곳을 보았었는데 이렇게 직접 와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클래식한 영국의 소방차>
여기까지 보고 나니 갑자기 피로감이 마구 몰려오기 시작했다. 영국의 우중충한 낭만도 피로 앞에서는 그냥 축축한 가을일뿐. 빨리 숙소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오늘의 하이라이트 버킹엄 궁전을 건너뛸 수는 없다는 마음에 열심히 걸어가는데, 갑자기 옆으로 빨간 차들이 지나갔다. 영국의 클래식 소방차였다. 아니 뭐 이런 것까지 예쁘고 난리람. 신기한 것을 하나 보고 나니 다리에 힘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멀리서 버킹엄 궁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 여행 필수코스 버킹엄 궁전>
버킹엄 궁전에는 영국의 여왕이 살고 있다. 그래서 늘 문이 닫혀 있는데, 여왕이 휴가를 떠나는 기간에는 일반인들도 관람을 할 수 있게 개방이 된다. 궁전 꼭대기에 위치한 깃발은 현재 여왕이 궁에 있는지 외출 중인지를 보여주는 표식이다. 우리가 갔을 때는 영국 국기가 걸려 있었고 그것은 여왕이 궁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여왕이 궁에 있다면 왕실기가 걸리게 된다.
설명을 듣다 보니 우리나라 제주도의 정낭이 떠올랐다. 제주도의 전통 가옥은 양쪽에 구멍을 세 개씩 뚫은 돌에 나무 기둥을 꽂아 현재 집주인의 거취를 알려주는 대문을 사용한다. 나무 기둥이 3개 꽂혀 있으면 멀리 출타 중, 2개면 이웃마을 방문중, 1개면 잠시 부재중, 0개면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집 안에 있을 때는 대문을 활짝 열어 누구든 받아들이던 그 마음씨가 마음에 든다. 또 그런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말이다.
<여왕님은 외출 중, 깃발로 알 수 있다>
<호두까기 인형 같은 근위병>
아쉽게도 근위병 교대식은 볼 수 없었지만 특이한 발걸음으로 궁 주변을 걸어 다니는 근위병들은 쉽게 볼 수 있었다. 각 잡힌 걸음걸이와 깊게 눌러쓴 길고 풍성한 털모자 그리고 붉은 슈트까지. 버킹엄 궁전과 그리고 우중충한 런던의 날씨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만남의 광장급 트라팔가 광장>
버킹엄 궁전 구경을 마지막으로 가이드님과 헤어진 우리는 천천히 걸어 어둠이 내린 트리팔가 광장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피곤한 날에도 놓칠 수 없는 꿀잼 포인트. 바로 뮤지컬 구경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오라고 대환영해주는 드림걸즈>
런던에서의 세 번째 관람작은 드림걸즈였다. '사보이 극장 Savoy Theatre'의 네온사인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대놓고 설렐 준비가 끝났다. 극장 안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우리는 이번에도 꽤 나쁘지 않은 자리에 앉아 뮤지컬을 관람할 수 있었다. 드림걸즈는 미국의 전설적 흑인 여성 트리오인 '슈프림즈'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로 극 중에 나오는 노래들이 하나같이 너무 좋았다.
<시작 전 이 순간이 제일 설레>
뮤지컬의 열기는 극장을 나와 집에 돌아가는 내내 우리를 들뜨게 만들었다. 영국 런던에서 3일 연속으로 뮤지컬을 관람하고 있다니. 꿈만 같구나. 누군가가 내게 '꿈은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깨어질 꿈이라고 해서 지금 달콤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런던에서 아주 푹 달콤한 꿈을 꿀 생각이다. 꿈속에서 이가 몽땅 썩어버릴 정도로!
+그동안 쓰지 못했던 세계여행 마지막 4개월간의 이야기를 다시 써보려 한다. 여행이 끝난 후 현실로 돌아온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도 기록해볼 생각이다. 언제든 떠날 수 있었던 그 때를 그리워하며, 다시 떠날 그날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