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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10. '빨간 머리 앤' 책 속 여행

이번 여행은 낭독극 때문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책 속에 묘사된 공간을 가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매슈와 함께 마차 타고 오는 '기쁨의 하얀 길'이나 '반짝이는 호수',

앤이 유난히 무서워했던 '유령의 숲',

반면 유난히 좋아했던 '연인의 오솔길',

다이애나와 함께 얘기도 나누고, 이별도 하는 등

소설 속 자주 등장하는

통나무 다리 아래 냇가인 '드라이어드 샘'.

솔직히 '드라이어드 샘'은 우리말로 풀어놓지 않아 별 관심이 없었는데

나중에 다시 살펴보니 '드라이어드 샘'은 거의 매 챕터마다

자주 등장하는 장소 주인공이었다.

실제로 가보니 앤의 집에서 다이애나집으로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이 작은 시냇물, '드라이어드 샘'.

그곳에 갔을 때조차 그것이 '드라이어드 샘'이란 걸 모르고

디저트 낭독 준비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이 바보 같은 사실에 앗! 다시 가야겠구나ㅜㅜ

<드라이어드 샘의 통나무 다리. 이 아래로 작은 시냇물이 흐른다>



처음 앤이 매슈를 만났던 브라이트 리버역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초록지붕집까지 오는 그 길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다이애나와의 포도주 사건이 일어난 주방과 거실은 어떤 모습일지,

앤의 집에서 보이는 다이애나집은 과연 실제로 있을까?

낭독회를 했던 화이트 샌즈 호텔은 얼마나 근사할까?


기분 좋은 밤이었다.
길은 호텔로 가는 마차로 붐볐고,
맑은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호텔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눈부실 정도로 환했다.

빨간 머리 앤 중 p. 465

그때 당시에도 교통 체증이 있었나 보다.

다만 자동차가 아닌 마차 체증이라니ㅋㅋㅋ

화이트 샌즈 호텔은 달베이 바이 더 씨라는 호텔에서

영감을 받은 장소라 했는데

실제로 보니 입이 안 다물어졌다.


화려하고 세련됨보다는

고풍스러우면서 우아한 자태가

호텔이라는 건물이라도 그 아우라에 경외감까지 느껴졌다.

호텔 앞 풍경은 외국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 그대로였다.

잔디밭 위 곳곳의 아름드리나무와 작은 호숫가.

그 앞에서는 유유자적 놀고 있는 거위 떼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였다.


어쨌든 책 속에서 나오는 곳들을 실제로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근거렸지만

또 한 번 믿기지 않을 말을 한다면 난 지금 그곳을 여행하고 있는 중이다!


<달베이 바이 더 씨 호텔은 앤이 낭독회하던 화이트 샌즈 호텔의 모델이다>




책의 처음 부분부터 따라가자는 의도에서 날짜도 6월 초로 일정을 잡았다.

그때쯤이면 캐나다 P.E.I. 는 벚꽃이 피는,

우리나라의 4월 중순 정도의 날씨인가 보다 유추하면서

2025년은 따뜻한 봄을 두 번 만날 것을 진작부터 예정해 놓았다.

그래서 난 올해의 봄을 아마 대충 느꼈을는지도 모르겠다.

더 예쁜 봄을 캐나다에서 만날 테니까 올해의 봄은 쫌 소홀해도 되겠지 했던 것 같다.



그곳에 도착했던 시각이 자정이라 다음 날 아침이 되길 무척이나 기다렸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었을 때

숙소 안의 푸르른 들판과 아름드리나무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희정샘한테 "여기 아름드리나무 좀 봐요~"했더니"

샘은 "나무 이름도 잘 아네요. 무슨 나무요?"

"아니, 아름드리요, 아름드리. 나도 저 나무 이름 몰라요~~"ㅋㅋㅋ

외투 하나를 걸칠 정도로 알싸한 아침 공기는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고,

발랄한 새소리와 싱그러운 초록이 나의 달뜬 기분을 더욱 업시켰다.

확실히 한국과는 다른 풍경을 가진 캐나다는

어디서든 넓게 펼쳐져 있는 푸른 잔디와 커다란 나무가 지천이었다.

이런 캐나다 모습과 비슷한 미국에서 온 두 샘들은

나의 반응과 다르게 시큰둥한 거 보니

진짜 여행자로서 내가 위너구나, 아비요!!

별 걸 가지고, 나 참^^;

<숙소 앞 테라스와 아름드리나무들 풍경>







이렇게 와서 보니 책에서 이해가 안 되던 것이 아아~ 그래서였구나 하는 것들이 몇 있었다.


"아, 아주머니. 너무 늦지 않았을까요?"
"아니다, 이제 겨우 2시인걸.
제리한테 마차로 소풍 장소까지 태워다 주라고 이르마."

빨간 머리 앤 중 pp. 187~188(인디고 출판사)

'어라! 초등생이 오후 2시에 소풍을 간다고? 그 시간이면 갔다가 와야 할 시간 아닐까?' 했다.

지내는 동안 그래도 되는구나 했던 게 밤 9시 반 정도가 되어야 어두워지는 걸 보니 저절로 이해가 됐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잘은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새벽 5시에 날이 밝으니

캐나다 P.E.I의 하루는 얼마나 긴 거야?

우린 이 긴 하루에 적응이 안 돼서 오후 4시 정도에서야 점심을 먹곤 했다.



그리고 앤은 자신의 이름에 꼭 e를 붙여달라거나 코딜리어라 불러달라든지,

'배리 연못'을 '반짝이는 호수'로 바꾸는 등

길이든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게 자주 등장한다.

이름을 바꿔 부르거나, 이름을 붙여주는 게 앤의 상상력 때문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구나 하는 사건 하나가 생겼다.


앤 박물관(Anne of Green Gables Museum)에서 출발하는 매슈의 마차 타기를 미리 신청했었다.

길이 워낙 울퉁불퉁해서 마차 대신 트랙터로 운행했고, 뒤편에 수레를 연결해 사람을 태우는 거였다.

그 옆이 바로 앤이 이름 붙인 '반짝이는 호수'가 강처럼 길게 흐르고 있었다.

마차를 타는 동안 몸통은 검은데 날개 끝이 주홍색인 새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회차 지점에서 잠깐 쉬는 동안 매슈 아저씨에게 그 새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 이름이 뭔지 까먹었지만 그냥 직관적으로 검고 붉은 새? 정도의 이름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 싱거운 이름에 그제야 이해가 됐다.

상상력이 풍부한 앤에게는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이름이 재미가 없었던 거다.

그러면서 우리도 그 새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곰곰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작은 새를 보고도 우리에게 이야깃거리가 풍성하게 생기는

이 책 속 여행의 묘미에 우리 서로는 말없이도 웃을 수 있었다.



"아, 아저씨. 우리가 지나온 저기, 저 하얀 곳의 이름이 뭐죠?"
"가로수길을 말하는 게로구나."
"가로수길이라고 불러선 안 돼요. 그런 이름은 아무런 뜻도 없으니까요. 음, 이렇게 부르는 게 좋겠어요. '기쁨의 하얀 길(Way of Delight)'요.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 멋진 이름 같지 않아요?"

빨간 머리 앤 중 pp. 43~44

무려 4,500m나 되는 하얀 사과꽃길, 앤이 말한 '기쁨의 하얀 길'!

그 길이 있는 P.E.I. 에 내가 와 있다니 아~ 믿을 수 없어.

그 길을 차로 가보기도 하고,

걸어가기도 하고,

뛰는 거는 왜 안 되겠어ㅋㅋㅋ.

아! 그런데~ 그런데~~

이 '기쁨의 하얀 길'에 대한 기대감이 큰 만큼 실망도 컸을까?

아니 실망도 아닌 차라리 절망이라 해야 할까.

그 길은 실존이 아닌 허구였다는 거.

빨간 머리 앤을 난 소설이 아닌 실화로만 받아들이고 있으니

나의 실수라면 실수ㅜㅜ

우리나라라면 관광을 위해서라도

이런 길을 진작에 만들어놨을 텐데 여긴 역시 순수한 캐나다!!


대신 지천에 깔린 보랏빛 꽃들이 어디를 가나 우리를 반겨줬다.

처음에는 라벤더인가 했는데 렌즈를 대보니 루핀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었다.

이곳이 너무 좋아 우리는 여기로 이민 와서 라벤더 꽃밭을 만들어

한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사업을 해볼까 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러다 프렌치 리버 지역 건너편에 넓은 루핀 꽃밭을 보고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광활한 스케일에 밀려 우리의 라벤더 꽃밭은 진작에 날아가버렸다.

아름다운 석양 속 루핀 사이로 하루 해가 지는 풍경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우리에게 포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냥 자연이 만들어놓은 이 꽃밭을

온몸으로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자면서

우린 황홀경에 빠져버렸다.


<프렌치 리버 건너편의 해 질 녘의 루핀꽃밭>


하루를 책 속에서 본 여행지를 둘러보다

오후에 보았던 검정색과 다홍색이 곁들여진 새에게

'주홍이'라 불러주기로 했다.


이렇게 우리는 책 속의 앤과 하나가 되어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작은 꽃에 감탄하고,

끝없이 펼쳐진 꽃밭에 취해

앤과 함께하는 하루를 마무리 했다.


안녕 주홍아~

안녕 보랏빛 향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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