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여름 아이에게 칠판을 사 줬다.
아마도 처음 칠판을 집에 들인 주에 아이가 독서록을 쓴 것 같은데, 책을 읽고 칠판에 그림을 그린 기억을 더듬어, 그 때의 상황을 독서록에 쓴 것 같다. 책 내용은 하나도 없는 그림 독서록. 하지만 어떤가? '아이가 뭔가를 생각해서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는데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내가 아이방에 칠판을 들인 이유는 단 하나, 글씨를 잘 쓰지 못해서 였다. '뭐, 천재는 악필이래'라고 눈을 감기도, 취학 하기 전 연필 쥐는 법을 잘 가르치지 못한 벌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의 엉망인 글씨를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다. 어느날, 아이가 글을 쓰는 모습을 살펴보니 글씨를 크게 쓰는 편인 아이가 격자형 네모칸 안에 글자를 구겨넣듯 글을 쓰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얼마나 답답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들인 것이 '칠판'이었다.
'에라이, 기왕 삐뚤빼뚤 쓰는 글씨, 마음껏 쓰기라도 해라!'라는 생각이었다. 아이에게 수학 문제를 가르치기에도 연습장보다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
칠판을 아이방에 들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교실 한 부분을 떼어놓은 듯한 기분?
무엇보다 아이가 무척 좋아했다. 크기에 제한 없이 마음껏 글을 쓰고 숫자를 썼다. 무엇보다 커다란 건물과 자동차 등 제가 보기에 '당연히 커야 할 물건' 들을 크게 그리면서 만족해했다.
나는 색깔이 많은 것을 유독 좋아하는 아이(무지개라면 환장할 정도다)를 위해 분필 색이 여러 가지가 준비된 것이 없을까 찾아봤다. 희망사항이었지만 분필먼지가 가급적 날리지 않고, 손에도 덜 묻는 그런 것을 찾았다. '과연 정말 그런 분필이 있을까?' 하면서. 그런데 정말 그런 분필이 있었다!
원래는 일본의 작은 기업에서 생산하던 제품인데, 국내 기업가가 아예 인수를 해서 국내산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분필계에서는 워낙 유명한 제품이라 이름은 일본 이름 그대로를 쓰는 것으로 기억한다. 가격은 문교 분필에 비하면 상당히 고가이지만 정작 분필을 써야 할 아이가 좋다는데 어쩌겠는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아이방에 칠판을 들인 덕분에 '공간 감각'이 생겼다. 그리고 칠판에 수많은 글씨를 쓰면서 점점 예뻐졌다. 글자가 드라마틱하게 좋아진 건 칠판보다는 2학년때부터 시작한 '서예반' 방과후 수업이었지만, 칠판 덕분에 한창 사칙연산을 하던 수학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아이가 선생님이 되어 나를 가르치기도 하고, 누가 더 빨리 문제를 푸는가 하는 다투는 수학문제 풀이도 함께 했다.
요즘의 칠판 용도는 일종의 플래너 역할을 하고 있다. 내일 학교에 가져갈 물건을 적거나, 이번 주에 외워야 할 영어단어를 적어놓기도 한다. 여행계획이 있는 달에는 'D~00일'과 같은 달력 노릇도 한다.
초등학생을 키운다면 가능하면 칠판을 들이기를 권하고 싶다. 공간이 부족하거나 여의치 않다면 화이트보드라도 구입하면 좋겠다. 칠판의 용도가 뭔가? 바로 쓰는 것이다. 아이가 글과 숫자를 많이 쓰면 쓸수록 나아지고 학업에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 색깔이 많은 분필을 구입해 주면 미술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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