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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를 원하는, 친구를 위한 글

by 리치보이 rich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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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람'을 뜻하는 이 단어는 개개인의 인간을 발전시켰다.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하고 노력하는 일은 칭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오늘을 감사하는 일'을 잊게 되면 행복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저당잡히는 일까지 생겨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이길래 우리를 이토록 갈구하게 하는 걸까? 만족감, 뿌듯함, 승리감, 벅찬 감동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 감정은 안타깝게도 '잠깐' 동안 느낄 수 있다. 얼마나 잠깐이던지, 그 감정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거나 심지어 내가 느낀 그 감정이 '행복감'이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다. 강조하건대 행복이란 감정이 너무나 순간이라서 우리가 '행복'을 입버릇처럼 입에 달고 사는지도 모른다.


주위를 살피다 보면 '늘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수시로 '나는 행복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낯빛부터 다르고, 표정도 살아있다. 그들은 그 짧다는 행복을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걸까?


그들의 행복은 아주 사소하다. 볕이 좋아 행복하고, 시원한 빗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 행복하고, 따끈한 밥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하다. 그래서 일까, 그들은 행복한 순간을 잘 찾아낸다. 뒤집어 말하면 행복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치이~ 그런게 뭐가 행복이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열 사람의 생김새와 성격이 모두 다르듯 사람들이 저마나 느끼는 행복감도 다르지 않을까.


가장 안타까운 것은 불행한 순간을 만났을 때 평범하기 그지 않은 심심한 나의 지난 일상들이 사실은 무척이나 '행복한 순간'이었단 걸 알 때이다(사람들은 똥인지 된장인지 눈으로 구분할 수가 없나 보다). 살면 살수록 그런 후회가 늘어간다. 그래서 내가, 친구들에게 하는 소리다.


당장 어제 본 넷플릭스 영화 <기차의 꿈>을 봐도 그렇다. 부모의 존재도 모르고 외롭게 홀로 살던 사내가 우연히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가정을 꾸려 아이까지 낳았다. 그랬으니 그 나날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런데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먼 곳으로 일을 떠나고 그 사이 가정에 화가 들이닥치고 결국 사내는 또 다시 혼자가 된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했어야 했을까.


그는 행복할 줄 알아야 했었다. 그리고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기 보다는 오늘의 행복을 만끽하기를 매일 희망했어야 했다. 내가 땀 흘려 일하고, 공부하고, 밤늦도록 뛰어다니지만 '오늘의 행복'의 토대 위에서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나는 오늘 일 하느라 너무 힘들었어'하고 투덜댈 것이 아니라,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도 하루 종일 티도 나지 않는 집안일하면서 지쳤어'라며 목소리를 낼 것도 아니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오늘, 힘들었지? 수고했어.' 하며 등을 토닥일 것이다. 그러면 지친 하루도 보람나는 하루가 된다. 행복감은 그때 피어오른다.


보이지도 않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저당잡고 있는 친구여, 자네는 행복한 오늘을 밟고 지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자네는, 자네가 알지 못할 뿐 실은 행복한 사람이다. -rich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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