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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운 May 05. 2024

권위에 도전해야 하는 이유

진정한 권위는 도전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을걸!

일단 부정적인 말부터 시작하자. 권위라는 말은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가 겪은 역사로 인해 '권위' 다음에는 '주의'가 붙는다. 권위주의 국가, 권위주의 정권 등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다. 반면 권위가 긍정적인 것은 신뢰감을 준다는 것이다. '권위 있는' 사람이 이야기한 것은 믿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권위에 짓눌려 살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권위'를 갖는 것, '권위'가 있는 것은 다양하다.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관습이나 법은 다 권위적이다. 오랫동안 해 왔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훌륭한 업적을 쌓은 사람이 언급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 법에 그렇게 하도록 정해져 있기도 하고, 조직이나 회사 같으면 규정도 그런 권위를 갖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권위'에 짓눌려 살고 있다. 내가 자발적으로 결정하지 않은 것은 모두 권위에 의해 떠밀린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특히 조직 사회는 더하다. 기존의 업무 수행 방식, 성공의 기억이나 실패의 교훈 등이 두루 섞여서 권위를 형성한다. 군(軍)도 마찬가지이다. 군은 전사(戰史)에서 교훈을 도출한다. 이러이러한 요소가 전쟁에서 승리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혹은 패배의 원인이었다는 식별 한다. 이를 통해 '교리'를 도출하는데 그 교리의 권위는 막강하다.


이런 권위에 관해 주목할만한 말을 한 사람이 있다. 마오쩌둥과 에리히 프롬이다. 의외라고 생각되지만 마오쩌둥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종교적 교의(교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맹목적인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당신들의 교의는 분(糞) 만도 못하다고 말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오히려 권위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는데, 그것도 의외다. 그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마르틴 루터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권위를 혐오하고 그것을 뒤집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성격 자체가 원래 권위적일 수 있으며, 권위를 뒤집고 나서는 자신이 다시 권위주의의 화신으로 군림하게 되기 쉽다.” 권위에 관해 이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은 우리가 '권위 있다'라는 관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잦을수록 좋다. 진정한 권위는 도전을 우아하게 받을 것이다. 적어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과학은 하나의 질문에서 하나의 답을 찾고, 사회과학은 하나의 질문에서 파생된 여러 답 중 타당성 높은 하나의 답을 고른다.” 김형석 연세대 교수의 말이다. 지금 시대는 효율성과 가치가 숫자로 측정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표를 통해 증명되지 않는 가치는 가치로서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이다. 이런 시대적 환경에서 교리가 권위를 가지려면 교리를 통해 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할 수는 없다. 물이 끓는 온도가 섭씨 100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물이 끓는다는 사실 만으로 현재 물의 온도가 섭씨 100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물은 고도가 높아지면 더 낮은 온도에서도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숫자는 절대적 기준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바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숫자가 가리키는 것이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숫자는 특정한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기준이나 분석의 틀과 같은 형식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기준이 제시하는 수치와 틀이 제시하는 규격에 몰입하다 보면 본질이 흐려진다. 그런 기준과 틀을 제시하는 이유를 잊어버리고, 기준과 틀에 맞는 판단을 하기 위한 생각을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며 모양과 방향이 잘못됐다는 평을 하는 동안 달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현상과 같다. 상대성 이론은 양자 이론으로 인해 일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자연과학이 기존의 이론이 틀렸다고 하는 마당에 사회과학은 오죽할 것인가. 사회과학 이론은 후속 이론에 의해 이전 이론이 뒤집힐 가능성이 자연과학보다 더 많다. 이 말은 언제나 옳은 법칙은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론 자체가 현실을 가지치기하여 분석과 이해가 쉽게 만든 것이므로,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이론이란 것은 어불성설이란 것은 이론의 태생적 한계다.


권위는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게 타당하다고 여기는 경우에 비로소 '권위 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교리도 그와 같다. 교리 자체가 뭔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 교리는 방향을 제시하고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는 수단으로 여겨야 한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잦을수록 좋다. 진정한 권위는 도전을 우아하게 받을 것이다. 적어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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